“부임하는 길에 있어서는 오직 엄하고 온화하며 과묵하기를 마치 말 못하는 사람인 양 할 것이다.”
정약용은 새로 임기를 시작하는 수령이 가장 주의해야 할 대상으로 아전을 꼽았다. 아전으로 지칭되는 휘하 공무원들은 수령이 하려고 하는 일을 성공시키거나 좌절시킬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알고 있는 세력이다. 그들은 재임 기간이 짧고 법령을 세세히 알지 못하는 수령과 달리 지역의 안정적 지배자로서, 국왕과 백성 사이에서 국가정책을 직접적으로 집행하는 1차적인 관리자였다.
정약용이 보기에 아전 장악의 첫걸음은 부임 초기 수령의 언행에 달려있는데, 부임 후 첫 만남에서 수령은 엄하되 온화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신관의 태도를 살피는 노회한 아전들은 먼저 신관의 의복과 안마의 차림새를 알아보고, 만약 사치스럽고 화려하다 하면 씽긋 웃으면서 ‘알 만하다’ 하고, 만약 검소하고 질박하다 하면 놀라면서 ‘두렵다’고 한다.” 따라서 수령은 처음 만나는 “아전과 하인을 대함에 경솔히 체모를 손상해서는 안 되며, 또한 뽐내고 젠체해서도 안 된다. 장중하되 능히 화평하면 될 것이니, 오직 묵연히 말을 않는 것이 무상의 묘법인 것이다.”
그렇다고 침묵만으로 지방행정을 이끌 수는 없다. 정약용은 뽐냄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질문하기를 권장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일을 잘 아는 체하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여 두리뭉실 의심스러운 것을 그냥 삼킨 채 다만 문서 끝에 서명하는 것만 착실히 하다가 아전들의 술수에 빠지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 그것이다.
질문하는 데도 요령이 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아전들의 그물에 걸려드는 일이다. 부임 직후 아전이 ‘읍총기(邑摠記)’라는 책자를 가져와 각종 이권이 걸린 사업 현황을 보고하는데, 수령이 조목조목 물으며 관여하는 순간 벌써 헤어 나오기 힘든 수렁에 빠져든다. 이런 보고를 받으면 일절 질문 없이 묵묵히 듣기만 한 다음 돌려보내되, 다음 날 아침 그 아전을 불러 고을 백성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야 한다. 나의 관심은 지역의 이권사업이 아니라 “백성에게 편의한 정사(政事)”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우쳐 주라는 게 정약용의 조언이다.
중요한 것은 윗사람이 질문을 잘하는 것인데, 이와 관련해 세종의 질문법이 주목된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은 중요한 일에 대해 물을 때 두루 묻되(詢), 보고하는 자로 하여금 대책을 상중하로 분류해 대답하게 한 다음(陳上中下之策), 그 중 좋은 의견을 채택하곤 했다(當從某策)고 한다.
여기서 두루 묻는다는 것은 그 일이 발생하게 된 배경(所從來)과 현재 상황, 그리고 예상되는 일의 전개 등을 빠짐없이 물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일의 담당자가 생각하는 대안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하되 각각의 장단점을 세밀히 말하게 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정말 중요한데, 담당자의 보고를 경청한 다음 그 중 하나를 채택해야 한다. 그래야 담당자가 그 일을 자기 책임으로 여겨 실천하려 할 것이고, 다음번의 보고가 더욱 충실해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우리나라 지방자치법이 처음 세워진 날이다. 1949년 7월 4일 제헌국회는 그 어수선함 속에서도 지역문제를 주민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하게 하는 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69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민에게 편의한 행정’을 제대로 알고 시행하는 지방자치단체장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휘하 공무원에게 지시하기보다 헤아려가며 경청하는 리더, 체계적인 보고를 통해 지역 현안을 실제로 풀어가는 공무원들이 단 한 명이라도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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