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훨씬 이전의 시간에 >
새벽의 아주 움찔하게 차가운 기온과 뚜름한 날씨가 비가 오려는 것인지,
이제 막 그친 것인지 언듯 분간이 잘 안되는 느낌으로
어둑한 사위를 더욱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고, 조금 전 막 볼일을 본 몸의 상태는 약간은 찝집하지만
어찌보면 큰 무게를 덜어낸 듯한 가벼움이 교차하면서 좌우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는 상태처럼
혼란이 둘러대고 있으며, 전방에 어스름 하게 보일듯 말듯 간당스럽게 한들거리는 숲 속의 어둠과
물체가 어둡게 반사하는 빛으로 인한 난반사가 검은색 바탕색에 짙은 회생이 춤추는듯
기막히게 어울려 마치 있는듯 없는듯 하다..
조금전 당장이야 별일이 없을 것 같아서 급하게 볼일을 보면서도 내심 불안한 마음에 대충 걷어 올렸던
바지단추를 다시 풀고 팬티 속에 런닝을 가지런히 우겨 넣은 다음 지퍼를 올리고 윗단추 걸쇠를 걸어 잠그고
엑스밴드에 걸쳐 있는 탄티을 조용히 결합했다. 차가운 공기가 허리와 낭심부위를 움찔하게 만든다.
수통 두 개에 가득한 물의 무게와 30발들이 탄창 여덟 개, 대검과 수류탄 두 개를 걸쳐 얽어놓은
조끼와 엑스밴드의 조합은 꽤나 무게가 나가서 조금만 메고 있어도 양 어깨 쇄골사이에 묵직한
통증이 오게 마련이고 한달에 한번씩 철야로 실시하는 60킬로 야간급속행군을 할라치면
아예 밖에서 구해 온 여성용 생리대를 양 어깨에 붙여 놓아야 행군이 끝난 뒤 어깨 쭉지의
살갗이 벗겨지고 아릿한 통증으로 인한 생고생을 면할 수 있다.
벌써 작전을 나온지 보름째, 중간 중간 전투식량과 필요한 필수품을 적시에 보급을 받아서 배고플 일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고산지역에 초가을이라 밤 열한시가 넘어가면 지금 갖추고 있는 전투복과 내피 없는 야전잠바,
그리고 판쵸우의와 얇다란 비닐조각으로는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추위가 제법 고통스러웠다..
인디고라이트 버튼을 눌러 본 타이맥스 전자시계의 시간은 벌써 새벽 세 시 반,
갑작스런 한기에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지만 어제 저녁 일찌기
떨어진 낙엽을 최대한 잘게 부수고 소나무 잎을 한가득 주워와서 바닥에 깔아 놓으니
푹신하면서도 소리도 나지 않았고 바닥의 한기도 차단해 주어서
심리적으로도 이 비트에 좀 더 버틸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백두대간 구간의 남한 최북단에 위치한 해발 1,300미터 고지는 벌써 서리가 내렸고
저녁 여덟시만 넘어가면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서늘함이 목 부위까지 전투복 깃을 올리게 만들
정도다. 평소 절기를 볼 때 보름 정도만 더 있으면 첫눈이 내릴 곳이 이 곳 이었고 새벽에 해가 뜨면서
여명과 일출사이에 비춰지는 암벽과 산구릉 사이에 깔린 구름..그리고 햇살이 엮어내는
천하절경에 스스로 감탄하는 것도 단 몇 일뿐, 이번 작전이 무한정 길어 지면서 그저 한가지 바라는 것은
빨리 작전이 끝나고 일주일 째 갈아 입지 못한 찝집한 속옷을 벗어 던지고 얼음처럼 찬 물이라도 좋으니
물에 풍덩 뛰어 들어서 한 웅큼은 밀려져 나올 때도 밀고 비눗칠하면서 시원스럽게 씻고 원샷으로 소주 한병을
병나발을 불고 난 뒤에 비계 둥둥 뜨고 식감좋은 살덩어리와 잘 삭은 김치가 콧등을 간질이는
돼지찌게 국물 훌훌 불면서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반나절이라도 잠을 푹 자고 일어나면 지금 이 지글지글한
몸 상태가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기분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전 볼일도 뻑뻑한 전투식량에 레이션만 2주일이 넘도록 까먹으니 소화가 제대로 될리 없고
그것도 밤낮으로 서너 군데에 파놓은 비트를 옮겨 가면서 낮에 잠깐 자고 밤에는 눈 부라리고 매복을
서는 움직임 거의 없는 종일의 생활에 변비가 안 올 수 없었는데 그나마 아껴 먹는다고 짱박아 놓은
전투식량 반찬인 볶음김치가 상했는지 갑작스럽게 설사기가 돌아서 통쾌하게 본 것이었다..
원래 비트에는 두 명이나 세 명이 각자의 몸 하나 겨우 누일만한 공간이지만 작전이 장기화 되면서
1인 1비트로 운영이 되었고 상대적으로 널럴한 상태가 되어 혼자서 몸을 누이고도 남을 공간이
생겼다..그래서 원래 볼일을 보려면 비트에서 아주 원거리로 조심스레 기도비닉상태로 이동한 후
완전무결하게 뒷처리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이 새벽에 제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매복을 서고
있는 동료들의 고도로 훈련된 눈과 귀를 속이긴 힘들고 벼락같은 수류탄과 총탄세례를 받기
마련이라
다행스럽게도 비트의 왼쪽 구석은 파기 어려운 점토가 아니라 마사토로 되어 있어
어찌 어찌 비트내 구석에 땅을 팠고 조심스럽게 비트 커버를 완전히 닫고
볼일을 보는데 몇날 몇일을 묵은 그 역한 냄새와 소리가 이 야밤에 퍼져나가 적에게 나 여기 있으니 잡아 잡숴
하고 광고하는 꼴이 날까봐 괄약근으로 최대한 조절하면서 설사기를 제어하느라 시셋말로 생땀을
흘렸었다..
5미터 좌우옆의 비트에 은닉해 있는 김진식 중사나 노충렬 하사에게서도 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배변훈련만큼은 제대로 배웠고 또 실전상황에서도 통할 정도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피식 쓴 웃음이 나왔다..
볼 일 후에는 비트 바닥에 가득 쌓아 놓은 나뭇잎과 흙으로 잘 덮고 납작한 돌로 잘 공구어 놓았기에
실수로 밟을 일도 없고 냄새도 비트 커버를 조금씩 열면서 바람이 불면 많이 열고 하면서
은밀하게 배기시켰기 때문에 까탈스럽기로 소문한 김중사도 노하사도 전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를 못 챌 정도였다..혹시 알면서도 모른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저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데 김중사와 연결된 왼쪽 신호줄이 느슨하지만 완고하게 세번 끊어서 당겨져 온다.
팽팽한 긴장감에 오줌을 지릴뻔했다.
세번 딱딱 끊어내는 신호는 전방에 이상징후 감지라는 건대..
나는 다시 오른 쪽 신호줄을 똑 같이 세번 끊어서 당겨서 노하사에게 상황전파를 했고
왼쪽 줄을 두번 길게 잡아당겨서 상황접수되었음을 알렸다..곧바로 노하사에게서도 같은
접수신호가 전달되어 왔다.
세명의 특공대 병력이 이제 같은 상황을 실시간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망설일 것 없이 평소 훈련받은대로 곧바로 K-1A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점사로 클릭했고
왼쪽 조끼 상부에 스트랩 되어 있는 야간 투시경을 살며시 벗겨 냈다.
이 곳 비트 매복조가 세 명이고 우리 뒷 쪽 50미터 후방으로 여섯 명이 좀 더 넓은 간격으로
V 자 매복이 서 있으니 앞의 이상징후가 우리가 그토록 찾던 그 것이라면 피해 나갈 수는 없다.
우리의 매복을 눈치채고 뒤 돌아서 간다면 역전송 신호체계에 의해 주변에 산개되어 있는 특공대 병력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될 터이니 김진식 중사가 전해 온 이상징후가 틀림없다면 그 것은 절대 이 곳을
벗어날 수 는 없을 것이다..김중사는 이미 전방 500미터 지역에 L 자와 역 L자로 배열매복하고 있는
아군 주병력에게 무전기 통화 손잡이를 짧게 모르스 부호식으로 전송했을 것이다..
상황이 발생하여 우리 앞의 그것이 뒤돌아 도망치게 되면 다시 신호를 보내고 전방지역의 아군 대기조들은
그에 맞는 상황조치를 할 것이다..이 산 반경 1킬로에 무려 12개 지역대의 병력이 촘촘하게 벌집 매복을
서고 있으니 북한의 최고정예 정찰여단이라 할지라도 빠져 나갈 구멍은 없다고 봐야 한다.
주눈인 오른쪽 눈에 야간 투시경을 대고 전방을 약 20cm 간격으로 좌에서 우로 긁어가면서 집중해서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김진식 중사는 좀 더 고급형인 적외선 투시경으로 관찰하고 있을 터이고
오른 쪽의 노충렬 하사는 광량증폭식 구닥다리지만 쌍안경 형태로 되어 있어 입체적인 움직임을 잡기에는
좀 더 나은 성능을 가진 쌍안투시경으로 전방을 훝어 내리고 있을 것이다..
여섯번째 관측 구간..즉 1미터 20cm를 끊었을 때 다음 구간으로 넘어가려던 내 눈이 잠시 멈칫했다.
뭔가 어른 거리는 미세한 움직임이 관측되었는데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집중을 해서
보아야 했다..눈을 가볍게 두어 번 비비고 방금 의심표적을 딴 그 지점에 관측경을 고정하고 뚫어지게
쳐다 보기 시작했다..
- 계 속 1 -
순식간에 얼얼하도록 추웠던 느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팽팽한 긴장감에 나 스스로도 땀이 목덜미에서부터
베어 나오는 것을 느낄 정도로 집중해서 관측경을 통해 의심되는 물체를 바라보기 약 10여분 되었을까..
그냥 잘 못 보았나 하고 다시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몇 번 껌뻑거리고는 다시 집중해서 보자, 아까의 그위치에서
움직임이 보이던 그 무엇이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김진식 중사도 노충열 하사도 그것을 감지했는지 그 집중감이 나에게까지 느껴질 정도 였고..
일단 확인된 표적이 우리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나도 우리도 모두 그 상황에 맞는 대응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클레이모어는 설치하지 않았다..실제 이런 매복전투, 그것도 한 두명의 적을 상대하는 용도로는 화력이
너무 크고 잘 못하면 계산상으로 나의 위치를 고스란히 적에게 알려주는 것이 되어 정밀한 반격을 받기
쉬우며 몇 번의 시물레이션 결과 700개의 강철구슬이 납작하게 엎드려서 접근하는 적, 그것도 소수의
적에게는 별반 제압효과가 상당히 떨어진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대규모 이상의 적이 침투형태로 접근할 경우에는 이것만한 대응수단이 없다..
거의 6~70%의 살상율을 입히는데다가 적이 어리버리한 상태에서 수류탄과 소총을 집중사격 하면
대개의 경우 2분 이내에 상황은 종결되기 때문이고, 적 부대의 규모가 클수록 그 효과도 더 커질 수 있다.
수류탄으로 대응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이고, 조금전 눈을 뗀 관측경에서 본 적의 거리는 거의 50미터
정도였다..결국 수류탄 투척거리내로 올 때 까지 기다렸다가 수류탄을 공중폭팔 시키거나 연속 투척으로
제압하는 방법과 지금 잡고 있는 K-1A 기관단총으로 일발 저격을 노릴 수 밖에 없다.
그동안의 훈련, 특히 야간사격에 집중을 한 결과 우리 지역대원 모두가 야간 사격에서 9발 이상을 명중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눈에 익고 고정된 타겟의 경우이고 지금처럼 적이 몸을 완전히
땅에 밀착시킨채 지독하도록 느리게 접근 한다면 실제 명중한다는 것은 상상이상의 정밀함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 뒤에 매복하고 있는 6명중 한명이 가지고 있는 야간조준경이 달린 K-2 소총이라면 별문제 없이 맞추겠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세 명에게는 그런 장비는 없다. 뒷 조에서 보유한 야간 조준경도 특전사에서 폐기하다시피 한
장비를 우리 중대 김정철 행정보급관이 타고난 손재주를 활용해 다시 살려낸 것이다.
그래도 믿을 것은 스무 다섯발이 장전된 탄창을 턱에 물고 있는 이 놈밖에는 없다..조심스럽게 가늠쇠를 살짝
덮어 놓았던 검정색 면포를 벗겨냈다.. 그러자 뫼산자로 형성된 가늠쇠 정중간 부분 뒤에 약하게 표시된
야광표식이 은은하게 보일락 말락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는데 신호줄이 다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왼손으로 은은히 줄을 잡자, 길게 두번 짧게 한번 당겨지는데 그것은 확실한 메시지였다.
< 각자의 판단에 따라 즉각조치하라..>
곧바로 옆 비트의 노충열 하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다시 관측경으로 전방의 물체를 확인하자
그 짧은 시간에 2~3미터는 더 앞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보름전 작전을 나오기 전에 연대장의 훈시 겸 격려사에서 분명히 얘기한 내용,
" 이번에 미군 군사위성에서 감지한 내용을 보면 우리 연대 전면에서 이어지는 예상 땅굴 축선상에
적의 소규모 정예집단이 입굴하는 것이 관측되었고, 다양한 정보루트를 통해 확인해 본 결과
북한에서도 가장 최고 특수부대로 알려진 정찰국 소속 4 정찰대대원들이 땅굴을 통해 침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상부에서는 이 대침투작전을 조용하고 은밀하게 종결하기를 원하고 따라서 특전여단의
대대적인 투입은 없다..우리 군단내에서 이런 임무를 소화해 낼 수 있는 부대는 당연히 우리 연대뿐이다."
그랬을 것이다..남한 곳곳에 암약 활약하고 있는 고정간첩들의 활동범위로 보면 정예중의 정예인 특전사
병력이 대대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분명 위로 전달이 될 것이고, 그러면 이 특수부대의 작전을 취소하고
돌아 갈 수도 있으므로 가급적이면 북한이 우리의 의도를 알 수 없도록 최대한 은밀하게 작전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군단 본부에서는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포병여단이나 일반 FEBA지역과 강원도
후방의 사단에게 통상적인 훈련이상의 훈련지침을 하달하지도 않았고 고스란히 약 스무명으로 예상되는
그들의 침투를 막고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리 연대만한 부대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연대 전체가 움직인 것도 아니다..고작해야 우리가 속한 1대대 병력만 예상되는 출구지점을
세군데로 축약하여 1개 중대는 예비로, 3개 중대는 각 지역대별로 나누어 매복 섹터를 나누어 준 것이다.
수색 정찰은 하지 않았다..통상적인 훈련범위내의 기동으로 보이게끔 우리 매복 부대도 요란스럽지 않게
전투식량만 수령하고 계속 이동하는 것 처럼 위장기동만 해 댈 뿐이었고 결국 핵심 작전부대는 3중대
우리 부대가 가장 확율이 높은 섹터에 이렇게 배치되어 가을을 느낄 겨를도 없이 벌써 보름째 이렇게
생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계속2 -
이유야 어찌 되었건 보름가량 우리 3중대와 1,2중대에 배속된 12개 지역대는 이 높디 높은 산악지역에서
나타날지 안나타날지 전혀 알 수 없는 땅굴 침투부대를 조용히 환영하기 위해 배치 되었고, 아무리
평시와 다름없이 평온상태를 유지 한다고 해도 지금 산 아래 쪽은 인근 사단의 수색대 병력과 우리 연대의
나머지 대대 전부는 하는듯 하지 않는듯 땅굴 출구 예상지역을 통상훈련의 형태로 계속 찾아 다니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땅굴이 이 고산지역에 출구로 되어 있을리야 만무하지만 침투한 병력이 스무명 남짓의 정예병력이고
북한도 땅굴 예상지역을 우리 군이 어림으로 파악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출구에서 나와서 반드시
이산을 넘거나 이 산줄기를 타야 백두대간 자락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기 편리할 것이다.
그런 전초부대가 나 잡아 잡숴봐 하면서 버젓이 북한군 복장으로 나타날 리 만무한 것이고 상부나
우리 같은 말단 특공대원들 생각에도 그들은 분명 등산복 차림으로 백두대간을 타고 다니는 일반
산행객들 흉내를 낼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전방에서 안개가 밀려 오듯이 스멀스멀 접근 하는 물체가 점차 또렷해지고
있는 중이고 처음에는 하나로 파악되던 것이 이제 제법 숫자가 불어 적게 잡아도 대여섯은 되어
보였다..이런 상황이라면 소총을 집중사격하면서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 최고의 방책이다..
문득 수류탄을 무겁다고 단 두 발만 가지고 온 것에 막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 진 물 후회한다고 저 앞의 괴한들이 수류탄을 갖다 줄리는 만무하다..
팽팽한 긴장감을 접근하던 괴한들도 느낀 것일까..갑자기 움직임이 멈췄다..
고도로 훈련받은 북한의 특수부대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정찰여단 병력이 틀림없다면
그들의 오감으로 충분히 우리 3명의 매복을 눈치 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선제공격의 타이밍이 더 중요하다는 압박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 때 왼쪽의 김진식 중사쪽 비트에서 뭔가 번쩍하면서 동시에 타타탕~~ 하는 점사 사격소리가
들려왔고 나도 움찔하면서 그대로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점사 모드로 되어 있어 투투툭 하는
파열음과 함께 총알이 전방 방향으로 발사되었고 오른쪽의 노충열 하사도 곧바로 사격을
해대기 시작했다..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아홉발의 연발발사음이 새벽의 공기를 가르며
온 산등성이를 울려대었고, 다른 생각 할 것 없이 두번째 방아쇠, 세번째 방아쇠를 거듭하여
당기자 불규칙한 총소리가 어지러히 이 산자락을 공명으로 울려댔다.
계속 당기던 방아쇠를 다시 당겨도 총에 반응이 없자, 나는 재빨리 특공조끼 수납함에서
새 탄창을 꺼내 재빠르게 교환하고는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매캐하면서도 어찌보면
구수한 화약냄새가 코 끝을 찔렀고 전방의 표적들 주위에 어스럼한 먼지가 계속해서
피어 올랐다.
두 개의 탄창이 다 비워질 무렵, 왼쪽의 김중사가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 유병장~!! 앞으로 튀어나가서 수류탄 두 개를 투척하고 다시 돌아와라.."
본능적으로 우리가 훈련받던 상황대로 세 명이 한조일 경우 한명이 앞으로 튀어나가서
수류탄을 투척하면 나머지 두 명은 한명의 기동로를 피해 엄호사격을 하고
투척후 돌아오면 다시 한명이 튀어나가서 수류탄 투척을 반복한다..
그렇게 내가 튀어 나가서 오른손으로는 K-1A 기관단총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는
수류탄 안전핀을 제거한 상태에서 안전걸쇠만 손아귀에 쥔채 달려 나가자
뒷쪽의 두 명이 단발로 수정한 상태에서 지속적인 엄호사격을 해 주었다..
- 계속 3 -
약 15미터를 전속력으로 뛰어 나가서 낮에 봐 둔 왼쪽 구석의 엄폐가 가능한 바위 뒤로
몸을 던지고는 수류탄 안전걸쇠를 느슨하게 풀었다..
하나..둘..셋..그리고 약 20여미터 앞쪽으로 수류탄을 힘껏 던지자..뒷 쪽의 매복조에서는
침착하게 그러나 규칙적인 리듬으로 앞방향의 괴한들을 향해 사격을 해 대었다..
확실한 그러면서도 단호한 점사 사격으로 제압사격을 하는 가운데 내가 던진 수류탄이
속으로 다섯을 외는 순간 번쩍 하는 섬광과 거의 동시에 강력한 폭발음을 내면서
터졌다..다른 생각을 할 것도 없이 다시 또 한발의 수류탄을 꺼내 아까와 똑 같은 방식으로
셋을 외면서 거무틱틱한 먼지가 이 밤중에서도 보이는 곳을 향해 같이 던지고는 미련없이
내가 있던 매복비트를 향해 움직이자..김진식 중사와 노충렬 하사의 사격이 잠시 멈추었다..
기막힌 타이밍이 연속으로 이어지면서 내가 비트로 몸을 던져 넣고 잠시 숨을 고르자..
일순간 요란했던 총성과 폭음이 멈추고 죽음같은 정적이 흘렀다.
훈련 받은대로 세개의 탄창을 각각 비웠을테니 무려 200발 이상의 5.56밀리 소총탄환이
우리 비트 앞 40여미터 전방에 쏟아졌다는 얘기고 덤으로 강력한 세열 수류탄 두 발이
공중 폭발로 그 일대에 강철 파편을 쏟아 부었다는 것인데..제 아무리 강력한 정찰여단이라
하더라도 대개의 병력이 살상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런 생각중에 김중사가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무전기에 대고 상황보고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틀림없이 조명탄 사격요청도 했을 것이다..내 짐작이 정확했던 것인지..
잠시후, 흰 불빛 꼬리를 내리면서 세 발의 조명탄이 일대를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고
곧이어 박격포 소리로 추정되는 낮으면서도 묵직한 포성이 들렸다.
이제 할 일은 뭔가?..아마도 후방의 지원병력과 저 앞쪽의 지원병력이 모이면
근처를 에워싸고 다시 특공조를 편성해 쑥대밭이 되어 있을 저 죽음의 지대를 수색하게
될 것이다..
- 계속 4 -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견착사격자세를 취하면서 전방을 주시했다.
화약과 먼지가 뒤섞인 뜬내 비슷한 냄새가 코끝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그 짧은 순간 이백 발 이상의 소총탄과 세열수류탄 두 발, 그리고 마치 공중에
호롱불이 매달리며 한들거리듯이 내려오는 조명탄의 어둑한 밝음, 우리 세 명의
즉각조치가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누구도 쉽사리 집중사격지역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는 않았는지, 김중사도 별다른 신호를 보내지 않은채 난생 처음 맞이하는
이 실전상황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하나의 실수도 하지 않겠다는듯 고민하는 느낌이
역력하게 느껴져 왔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주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무전기로 지역대장과
무슨 이야기를 짧고 단정하게 주고 받고 있었다..
이미 우리 비트 위치는 그간의 사격으로 다 노출 되었고 이제 은밀한 매복의
진지로서의 역할 보다는 그저 적의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역습에 대한
은폐와 엄폐진지로서의 역할 밖에 할 수 는 없을 것이지만,
그동안 교육받은 시청각자료에 보건대 지금 이상황에서 비트에서 나가서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판단이 아닐 것이다..적은 오감으로 은밀하게 매복하고 있는 적을
파악해 내고, 사격술에 있어서는 동아시아 최고수준의 전문가들이다..
추가 사격을 해야 하는지, 노하사나 김중사가 다시 뛰어나가서 수류탄 세례를
퍼붓고 돌아올지에 대한 판단이나 건의같은 것을 생각하기에는 말년 병장의
안전한 제대가 더 우선이 아닐까 하는 찰나의 고민이 이었고,
당장에라도 적의 은밀한 반격이 있을 것 같아
그냥 비트 덮개 닫고 대가리 수그리고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기를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렇게 전방을 눈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긴장감으로 계속 주시하고 있는데
다시 조명탄 몇 발이 터져 내렸다..이제 해가 뜨려면 두어시간 남짓이면
사위가 완전히 밝아질 것이고 적어도 한시간만 지나도 어느정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여명빛이 내릴 것이라, 상부의 별다른 지시가 없으면 그냥 이렇게
게기는 것이 장땡인지도 모르겠다..
잠시후 스스로 느끼기에 손아귀가 아릿해 와서 보니 케이원 소총의 권총손잡이를
얼마가 꽉 쥐고 있었는지 손에 마비가 오기 일보 직전이었고 왼손도 총열덮개 아래쪽을
하도 세게 쥐어서 손가락 끝은 이미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김진식 중사가 나긋하게 기다리던 명령을 전해왔다.
" 지금 현재 위치에서 추가사격없이 대기하라..그리고 별도 지시가 없으면
절대 사격하지 말 것..주변의 지역대 전병력이 이곳 위치로 아주 느리게 접근하고 있다..
소총 안전위치로 두고 대기할 것.."
노하사도 십여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도 보청기를 달았는지 내가 겨우 알아들을 정도의
나즈막한 소리를 다 이해한 듯..오케바리를 다시 묵직한 저음으로 전달해 왔고..
나도 슬그머니 소총의 격발위치를 안전으로 돌렸다..
갑자기 목이 말랐다..며칠이고 물한모금 마시지 못한 것처럼 말한마디도 못할 것 같은
뻑뻑한 건조감에 왼손을 내려 왼쪽 엉덩이 부위에 달려 있는 수통을 조용조용하게 꺼내
마개를 돌리고 입에 갖다 대었다..신병들은 이러한 순간이면 목을 젖히고 꿀떡 꿀떡 소리를
내면서 마실 것이지만, 이미 나는 병으로서의 최고의 계급..그것도 제대를 한달 반 앞둔
최고참이다..전방을 계속 주시하면서 수통만 왼손으로 꺽어 올리면서 입으로 몇 모금의
차디 찬 물을 흘려 넣었다..입 안에서 잠시 머물게 하면서 물과 몸의 온도차이를 최소화 한 다음
세번에 걸쳐 천천히 나누어 목뒤로 넘겼다..까칠했던 목에 그래도 물이라고 들어가니
갈증만 가시는 것이 아니라 현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뚜렷한 분석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불과 15분전..분명히 우리 세 명은 전방의 이상징후를 감지하고 각자가 가진 야간투시경으로
집중 확인을 했고..적으로 판단되는 움직임의 추정거리가 40여미터로 판단되어
집중사격과 수류탄 공격을 했고, 상대방에게서는 아직까지는 아무런 반격이 없었다..
이미 이 상황은 대대에까지 아니, 연대까지 보고가 되었을 것이고 지금 이시간에 우리가
펼친 작전의 성과를 확인하기에는 너무나 큰 위험, 아군끼리의 오인사격이나 적의 제대로
된 반격으로 인한 사상자 발생 등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한시간 이상의 시간을 가만히
대기하고 있는 상태다..
만약 저 앞쪽의 움직임들이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적의 침투전초부대였다면, 그리고
우리 세 명이 취한 즉각조치로 인해 어느 정도의 전과가 있었다고 확인되면, 나는 인생
풀리는 거다..헬기 타고 귀향하는 것은 물론이고, 요즘 뜨악하던 민주와의 관계도 다시
좋아질 수 있을 것이고..개판 오분전의 학교 성적에 관계없이 직장을 잡는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인터뷰도 할 것이고..학교에서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할 것이며,
얼마전 휴가 나갔을 때 만난 특전병으로 근무하는 명택이나, 해병특수수색대에서 막 제대한
병율이에게도 야코 죽을 일 없이 얼마든지 과장을 섞어서 나불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치 미친놈처럼 입가에 미소가 빙그레 걸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생각에 젖어 있는데 뭔가 뒷 쪽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코를 골면서 잠시 멈추고 있다가 다시 코가 터지는 듯한 그러나 매우 억제되고
강제된 듯한 소리..그것도 한번이 아니고 연발로 그러한 소리가 이어지는 듯한 느낌..
소리라는 것은 귀고막의 진동에 의해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느낌도 같이
동반하는데 일순간 매우 불길하고도 모골이 송연해지고 없는 머리카락이 다 곤두서는듯한 느낌..
우리 뒷 쪽이면 여섯명의 다른 지역대원들이 V자 매복을 서고 있는 곳인데..
거리는 50여미터 정도지만 강원도 산악지역의 차가운 공기밀도 때문에 소리의
전달속도나 밀도가 굉장히 정밀하게 다가 온다..
느낌이 하도 불안해서 김중사나 노하사 쪽을 연신 둘러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닌듯..
김중사도 노하사도 뒷쪽을 흘깃거리면서 쳐다 보다가 다시 앞을 보다가 하고 있다..
연대 주임상사의 정신교육시간에 들었던 아군과 적군의 특수부대에 대한 설명이 갑자기
떠 올랐다..
" 얘들아..너희들 가슴팍에 공수윙 하나 달고 뻘건 뼝아리 표식 하나 달고 다닌다고
밖에 나가서 설쳐대지 마라..
이 인근에만 나가도 12사단 수색대 애들 빵빵하다..옛날에 너희들의 전신으로 차출된
원조부대고..27사 이기자는 예비사중에서도 빡세기로 유명한 것 잘 알지?..젓가락 사단은
지금이야 철덩어리에 둘러싸여 옛날 같지 않지만 한 때 1군 전체의 예비사단으로 아마
알보병들이 너희들보다 걷는 거리가 훨씬 더 많다..고로 걔네들 수색도 화랑정신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엘리트 의식이 쫙 깔려 있다..이말이다..어슬프게 특공이랍시고 설쳐 대다가는
골로 가기 십상이고..전방 투입사단이라 자주 보지는 못하겠지만 백두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너희들이 자주 매복 훈련하던 화암재하고 상봉..그리고 신선봉 알지..그 곳은
알짜중의 알짜..전군을 통틀어 가장 혹독한 훈련받기로 소문한 그 분들이 계신 곳이다..
알아~? 몰라~?..괜스리 폼잡지 말고 외출 외박 나가거든 다른 사단,병과와 절대 부딛치지
말거라..알? 몰?..
그리고 너희 수준이면 딱 저쪽 위의 사단 경보대 수준이다..더 이상도 이하도 아일끼야..
저격여단이나 항공,해상 육전대,특히 정찰대 애들은 너희들이 떼거지로 덤벼도 운이
허벌나게 좋지 않으면 언감생심 생채기도 내기 힘든 아헤들이니까, 조심 또 조심하고
목위가 완전히 날아가지 않으면 절대 방심하면 안된다..
너희들이 특공무술 대충 때우려는 경향이 쎈데..옛날 일화 하나 얘기해 주랴?
북한애들 격술 말이야.."
그랬다..5공수에서 온갖 특수훈련을 다 마치고 근무하다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보병전환으로
우리 연대에 온 싸계가 그리 얘기 했으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은 분명 저 앞의 놈들 목위가 건재한지 어떤지 확인을 못하고 있는 상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문득 스무명 남짓이 움직인다면 나같은 말단 병이라도 절대 떼거리로
다니지는 않겠다..네 다섯 명씩 조를 나누어 다니거나 또는 그 이상으로 분산해서 혹시나 당할
수 있는 몰살의 위험을 최소화 하겠다..
어떤 회사는 절대 사장이랑 임원 또는 한가족 전체가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등줄기에 다시 한번 차가운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전율이 내렸다..
그리고 조금전 이상한 꺽음이 들리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 계 속 5 -
분명 여섯 명의 대원들이 이 곳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경사진 지대에 어둠이 짙긴 했지만
어떤 격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지 좀더 확실하게 보기 위해 야간 투시경을 대고 그 쪽으로 쳐다보자,
연녹색 배경에 조금 덜 녹색으로 보이는 인간의 움직임이 서로 뒤엉켜 어떤 상황인지
정확하게 파악이 되질 않았다..
또 다른 침투조가 우리 매복조를 습격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매복조가 당하고 있는 것일까?..그러면 아까 그 쇳소리 같은 꺽음은
누군가 무성무기에 의해 기습적으로 당했다는 말인가?
찰나의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고
어찌할바를 몰라 다시 김진식 중사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김중사도 같은 위기감을 느꼈는지
아예 목소리를 크게 하면서 외쳤다.
" 노하사, 유병장..여기 그대로 진지 고수하고 있어..한명은 전방을 보고
한명은 저 윗쪽 2선 매복조를 계속 주시하고 있으라고 내가 갔다 올테니.."
하고는 나나 노하사가 뭐라고 이야기도 하기 전에 비트를 뛰쳐 나와 후선 매복조로
달려 가기 시작했다..
앞 뒤로 동시에 벌어진 상황에서 나나 군대짬밥이 나보다 적은 노하사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소총만 죽어라고 쥐고 이리저리 휘이 저어댈 뿐이었다.
노하사가 전방을 보기로 하고 나는 야간 투시경으로 후방 매복진을 향해 고정시켜 놓고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오르내리막이 있고 나뭇가지들이 엉켜 있어 어떤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어내기는
어려웠지만 서로 엉켜 뒹굴고 있는 모습이 간헐적으로 투시경을 통해 내 눈에 들어왔고,
파도가 치고 내리듯이 김중사의 희미한 등줄기가 가끔씩 보이다 보이지 않다를 반복했다..
나나 노하사도 김중사와 같이 가서 뭔가 혼란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후방 매복진의
지금 상황을 당장 확인하고 필요한 즉각조치를 취했으면 좋겠으나 지금은 일체의
개인행동이 금지된 절대 매복상황이다..날이 트서 모든 상황을 비주얼로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 섣부른 돌발행동은 적군에게 보다는 아군에게 총알세례를 받기 십상이고..
김진식 중사는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후방측의 움직임이 하도 괴이하고
시나리오상 가장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에 우리더러 이 곳을
지키라 하고 자신은 그런 오인사격의 위험을 무릎쓰고 뛰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때 희미해져 가던 조명탄의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 들고..나는 당연히 추가 조명탄이 올라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으나 산 아래 지원중대에 배치된 곳에서 격렬한 총소리가 산자락을
다시 누비기 시작했다..
또다시 불길한 예감이 든다..저 아랫쪽은 비교적 안전지대로 미시령 도로를 물고 있고
백두대간 통제구역을 몰래 통과하는 대간꾼들을 막기 위해 설치해 놓은 간이초소가 있는 곳이다..
그 곳에서 격렬한 총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이 크게 뒤틀리고 있다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지금 이상태로 있다가는 된통 큰일을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평소 계급은 높지만 편하게 지내던 노충렬 하사에게 충분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 노하사!, 이거 일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우리 이렇게 가만히 있어야 될 상황이
아닌 것 같애..우야꼬?..내가 김중사님쪽으로 가고 노하사가 무전기로 상황을 파악해
보는 것이 어떨까? 아니면 지금 김중사님 비트에 있는 무전기로 지역대장에게 상황전파를
하던지..야..이카다가 우리 다 죽는거 아이가?..미치겠네.."
노하사도 어안이 벙벙한지 잠시 별 말이 없다가..
" 유병장!..유병장이 중사님 비트에 가까우니 무전기 들고 상황파악을 먼저 해 봐~!
그리고 필요하면 조치를 취하던지..나도 답답해 미치겄어.."
맞다 싶어서 바로 내 비트에서 빠져나와 김중사의 비트로 접근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다닐 수 는 없다..
혹여나 후방매복조의 K-2소총에 장착된 야간조준경에 내 머리가 순식간에 터질 수 도 있으니..
불과 오미터 거리가 이렇게 긴가 싶을 정도로 급한 마음으로 김중사의 비트에 들어가자
더듬거리며 무전기를 찾았다..다행이 무전기는 비트의 왼쪽 구석에 잘 갈무리 되어 있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송수신기를 집어 들었고..압력바를 누르면서 급하게 외쳤다..
" 지리 텐..지리 텐..당소 지리 삼..오버.."
" 지리 텐..지리 텐..당소 지리 삼..오버.."
칙칙하는 잡음만 들릴뿐 다른 답은 없었다..
뭐야 이거..지역대장도 당한거야..뭐야..
상황은 분명히 갈수록 꼬이고 있었다..조금 전 콩 볶는 소리가 들리던 미시령 아랫쪽에서는
더이상의 소란은 없었고, 후방 매복조로 뛰어간 김진식 중사는 아무런 소리도 어떤 지시도
없다..그냥 신참내기를 갓 벗어난 노하사와 제대를 50여일 앞둔 말년 병장이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뒤로 가지도 못하고 위로 보고라인도 되지 않은채 고립되어 있고,
중화기 중대에서 지원나온 박격포도 더 이상의 조명탄 사격은 물론 뭔가 대단한 일이 발생한 것처럼
쥐죽은 듯이 조용하고, 우리보다 훨씬 더 전방에 역 매복하고 있는 다른 지역대와의 거리는 뛰어서도
5분은 걸릴 거리에 있고 그들과의 연락방법도 없고 그렇다고 직접 몸으로 가다가는 아군 총탄에
맞아 죽기 딱 좋은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다시 내비트로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무전기에서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 지리 삼..지리 삼..당소 지리 빵..오버 "
뭐? 지리 빵, 지리 빵이면 우리 대대장인데?
고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얼른 무전기를 쥐고 응답했다.
" 지리 빵..당소 지리 삼..수신 양호..오버 "
역시 병장은 병장이다..대대장의 무전을 받고도 전혀 떨리지 않게 교육받은대로의 FM 수신을 했다..
" 지리 삼..잘 들어라..여명 전까지..타타탕.. 일체의 탕..탕..이동을 금하고 움직이는..타타타.. 것은 모조리 쏴라.."
대대장의 목소리가 맞는지 아닌지는 따질 겨를이 없었지만 분명히 중간에 수신문 중간에
총소리가 들린다..
삼척동자라도 지금 상황이 아군이 상황을 전헤 통제 하고 있지 못함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 지리 삼..수신 완료.."
대대장에게 무전기에 대고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명령은 명령이니 무조건 따라야 했다..
무전기 손잡이를 내려 놓고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내 비트로 옮기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비트 덮개를 다시 살짝 여는데..노충렬 하사가 있는 비트에 누군가가 아주 낮은 포복자세로 은밀하게
접근하는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 계 속 6 -
' 저건 또 뭐야..후방 매복조인가?..아니면 적인가?..
아 씨바 미치고 팔짝 돌겠네..고함쳐서 확인해 볼 수 도 없고..'
그러는 와중에도 그 검은 실루엣은 먹구렁이가 먹이감에 접근하듯이 씰룩 씰룩
노하사 뒷통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고..지금 경고를 날린다 해도 오히려
노하사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공산이 훨씬 더 커 보였다..
얼떨결에 오른 손에 파지하고 있는 K1A 소총을 집어들고 희미하게 가늠쇠에 발려있는
야광판을 어림잡아 움직이는 실루엣을 향해 조준했다..
야간 사격훈련시 김진식 중사가 항상 강조하던 말이 떠 올랐다..
" 주간사격하고 다른 것은 물체가 가늠자와 가늠쇠의 정중앙에 오느냐 안 오느냐의
차이뿐이다..이 것이 숙달되고 숙달되면 너희들 오른쪽 뺨에 개머리판이나 접철쇠에
맞물리는 느낌이 올거야..즉, 어깨와 목..오른 손과 왼손의 파지느낌과 가늠쇠의
위치를 자꾸 반복하면 결국 야간사격이란 것이 감각적인 사격으로 얼마나 몸에 익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고로..주간사격 잘 하는 놈이 야간사격 잘하게 되고..
즉각조치 사격 때에도 별도의 정밀한 조준 없이도 뺨과 얼굴의 느낌으로 자동적으로
정조준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사격훈련이 없을 때에도 늘 이런 습관을 들이도록..그러면 총에 관한한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가늠쇠, 가늠좌 정렬이라는 동작이 필요없는게지..알갔냐..이 꼴통들아.."
그랬다..상병 고참이 되어서야 김중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고, 아까의
집중사격과 마찬가지로 지금 동료를 살리느냐 마느냐의 중요한 기로에서 그것을 써먹을 것이다..
거리는 불과 십여미터..더이상 지체하다가는 나도 죽고 노하사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숨을 들이쉬고 절반이상 천천히 내쉬고..안전위치를 단발로 조정한 후
다시 잠시 멈추면서 부드럽게 방아쇠를 당겼다..
" 타~앙 ~~~!!! "
야광칠이 된 총구 가늠쇠가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하늘로 솟았다가 천천히 다시 내려왔다..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 타~앙~~~!!!"
그리고 비트를 완전히 빠져 나가서 노하사의 비트쪽으로 움직이려고 하는데 어떤 물체의 움직임이
오른쪽에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강렬한 폭발적인 살기..
느낌상으로도 낮은 포복을 위해 바짝 엎드린 상태에서 소총을 휘이 저어 다시 조준하기에는
본능적으로 너무 늦었음을 감지하고는 소총을 땅바닥에 놓고는 왼쪽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있는
대검을 뽑았다..그리고는 바로 몸을 일으켜 그 어떤 물체에게 바로 달려 들었다..
- 계속 7 -
그냥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상대에게 아군인지..너 북에서 왔냐라고 물어보는 것은
지금 이상황에서는 대단한 사치요..그 찰나의 순간이 나의 목이 굴러 떨어지느냐..
적의 목을 대검으로 긋느냐 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건 뭔가 한참 잘 못 되어도 한참 잘 못된 것이다..
오른손에 대검을 쥐고 왼손으로 안면을 보호하면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 탄력으로
상체를 최대한 앞으로 뻗치면서 상대방의 목으로 생각되는 부위를 힘차게 반원아크형으로
그었다..그리고 동시에 등 뒷쪽에서 강열한 총성이 같이 울린다..
분명히 상대방의 몸 어딘가에 닿았다면 대검을 쥔 오른 손에 묵직하게 걸리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내가 휘두른 대검 어디에고 그 움직임을 걸리게 하는 반탄은 없었다..
상체를 워낙 크게 써서 그럴까..몸이 오른쪽으로 기우뚱하는 느낌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전굴 자세로 내밀었던 오른 발을 다시 오른쪽으로 내 디디고
몸을 최대한 수그렸다..그리고 첫번째 선공이 빗나갔음을 직감한 나는 다시 대검을 왼팔과
교차시키면서 이번에는 곧바로 찌르기 위해 왼발을 앞으로 힘차게 내딛는데
조금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보이던 사람 몸의 형태가 서서히 뒤로 넘어가는 것이
초고속 카메라로 피사체를 찍을 때 보이던 끊김없는 동작으로 보였다..
방금전의 총소리는? 하는 생각이 들어서 왼쪽으로 힐끗 돌아보니 어스럼한 야간의 어둠에서도
노충렬 하사의 비트에서 들려온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잠시 멍하니 뭐를 할지 몰라 두리번 두리번 하고 있는데..
" 야~! 뭐해 유병장..죽고 싶어? 빨리 비트로 들어와~!!! "
이제는 야간정숙매복의 기본이고 뭐고 없었다..기도비닉이니 하는 것은 호사로운 훈련의 지침일뿐
지금은 적군과 아군이 서로 뒤섞여 조금만 방심해도 총알에 가슴팍이 터져 나가거나 상대방의
칼날에 목줄기에 피를 뿜어내기 십상인 상황이다..
노하사의 일갈에 정신을 다시 차린 내가 왼발 저편에 떨어져 있는 소총을 감으로 대충 더듬거리면서
찾아 들고는 내 비트로 잽싸게 뛰어 들어갔다..
별다른 큰 움직임은 없었지만 호흡은 목에 차고..양손과 양발이 덜덜덜 떨려왔다..
조금전의 대검공격은 비록 허공에 삽질한 형태가 되었지만 노하사가 내가 자신의 뒤로 접근하는
괴한을 단발 사격 두 발로 제압하자 바로 뒤로 돌아본 상태에서 나와 또 다른 괴한의 물리적
충돌을 감지하고는 나의 공격이 시작하기도 전에 제압사격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렇지..이 어둠 속에서 또 그 근거리에서 혹시라도 빗나가면 내 뒷통수만 뇌수를
터뜨릴 뻔했다..
헉헉 거리는 숨을 잠시 고르는 사이 노충열 하사가 장비를 챙겨들고 이쪽으로 몸을 최대한
낮춘 상태에서 잰걸음으로 와서는 비트속으로 쏙 들어왔다..
그 날렵한 폼이 마치 유령이 사람 몸속으로 쑥 들어가는 느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 유병장, 이거 상황이 보통 심각한게 아니네..아까 김중사님이 가신 저 뒷쪽 매복조는 이미
박살이 났다고 봐야되고, 저 아랫쪽 미시령의 중화기 포반도 대충 봐도 털려버린거 같애..
근데 아까 무전에서 뭐래?..지역대장님은 무사하신가?."
" 아냐..지역대장님은 아예 수신이 안되고, 지리 빵에서 날라온 내용은 지금 이 시간부로
무조건 이동금지고,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쏴라 하는데..그 중간에도 총소리가 계속
들렸어..노하사 말대로 이거 전쟁 제대로 터진 거 아닌가 몰라.."
" 어쨌던 지금 이 상황에서는 믿을 건 우리 둘 밖에 없어..꼬라지를 보아하니 전 지역대가
동시에 공격을 받거나 서로 칼 질을 하고 있는지.."
노하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가 매복을 서고 있는 비트 앞쪽 저 먼 산등성이에서
격한 불꽃이 먼저 파바박 일고 약간의 시차를 두고 총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조명탄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상황파악을 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은 여명을 한시간
정도 앞둔 가장 캄캄할 때다..다행이 별 빛과 하현달의 어스럼한 불빛이 실루엣 정도는
볼 수 있지만 하여간 갑갑하기 이를데 없는 상황이다..
" 근데 지금 우리 둘이 이 비트에 있는게 맞는거야..아니면 그냥 다른 곳으로 은폐하는게 맞는 거야?"
내가 짬밥은 앞서지만 그래도 계급이 있는지라 노하사에게 다시 묻자..
" 내가 내 비트로 다시 돌아가면 유병장은 김중사님 비트로 다시 가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지켜주는
형태가 맞는 거 같아.."
사실 맞는 말이다..이 산골짜기 매복하기 좋은 위치에서 5미터와 10미터는 엄청난 차이다
수류탄 한 발이면 둘이 이피를 당할 수 있는 것이 5미터라면 10미터는 그래도 둘 중 하나는
생존할 가능성이 높고..장기에서도 귀마형 보다는 원앙마 형태로 마가 서로 지켜주는 형태가
수비에 아주 효율적이지 않은가..
별다른 이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래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비트 밖으로 둘이
동시에 몸을 빼내기 위해 발에 탄력을 주려고 구르는데 전방쪽 비트 안쪽에 뭔가 날아와
박히고 어둠속이지만 먼지가 피고 흙덩이가 내 오른쪽 얼굴을 쎄게 때렸다..동시에 후방매복조
위치에서 총성이 울리고..근데 그 총소리가 아까 들었던 그 꺽음..코를 골다가 막 숨넘어가기
직전에 따닥하고 들리는 그런 소리였다..틀림없이 소음기를 장착한 소총이다..
노하사도 나도 동시에 비트 안쪽으로 완전히 몸을 숙여 내렸고, 그 와중에 철모의 앞주둥아리가
비트의 벽면을 긁으면서 텁텁한 흙덩어리가 코와 잎 위로 쏟아졌다..
다시 고개를 내밀 엄두도 나지 않았고 입안 가득히 들어 온 흙을 조심스럽게 혀를 오무려 뭉쳐
뱉어내는데 노하사가 자신의 수류탄 한 발을 내게 건네주면서 동시에 던지자는 신호를 줬다..
맞다 한 발씩 두번 던지는 것 보다는 두 발을 동시에 던지는 것이 만약 살상범위내에 적이
웅크리고 있다면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다..노 하사가 자세를 잡고 나도 자세를 갖춘 상태에서
안전핀을 뽑고 안전걸쇠를 풀면서 하나,둘, 셋을 셈과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켜 대충 짐작이긴
하지만 총알이 날아 온 방향으로 동시에 던졌다..
그리고는 정말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몸을 비트 속으로 다시 웅크리자..
" 빠방~~방" 하면서 정확하게 두 발의 수류탄이 동시에 터졌다..
그 소리를 듣고는 노하사와 나는 다시 동시에 몸을 일으키면서 각자가 지니고 있는
K1A 소총을 격렬하게 쏘려고 했으나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한 발씩 밖에 나가질 않았다..
그 때 조정간을 자동으로 옮길 생각보다는 그냥 손가락을 자동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단발을 마치 연발처럼 쐈다..스무번을 그렇게 쏘고 나니 노리쇠가 후퇴하면서 멈췄고,
곧 노하사의 소총도 탄창을 비웠다..
- 계 속 8 -
나도, 노하사도 재빨리 탄창을 새 것으로 교환하고 빈탄창을 탄입대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그 잠깐의 순간에도 이 빈탄창도 챙겨야 되지만 여태껏 쏘고 난 탄피를 나중에 수거해야 하나
하는 아주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인간이란 참으로 이상하다..
수류탄 하나 던지고 소총 몇 십발 정도 쏘는데 뭐, 100미터를 전력질주하는 것도 아닌데
왜이리 심장이 뛰고 눈을 마치 안구 저 안쪽에서 발버둥치는 느낌의 압력으로 튀어나오려
하고 안그래도 바짝 타는 입안이 아까 들이마신 흙덩이의 잔재로 느물거리는 이질감으로
괜한 토악질도 일었다..
고개를 살짝 들고 후방 매복조 방향의 상황이 어떤지 보기 위해 왼쪽 어깨에 스트랩 되어
있던 외눈 야간 투시경을 더듬거리면서 찾았으나 언제 떨어져 나갔는지 헛손질만 더듬더듬
하고는 다시 찾을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노하사는 목에 밴드로 걸쳐있는 광량증폭식 야간투시경을 가지고 있으니 전방 좀 확인해 보라고
할 양으로 고개를 돌리니 벌써 목을 최대한 거북이처럼 움츠리고 후방매복조가 있던 방향을
확인하고 있었다..조금전 수류탄이 터지고 소총탄 세례를 퍼부었으니 먼지가 자욱할 것이고
제대로 된 상황판단이나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했다.
뭔가 잘 안보이는지 몇 번이고 다시 고쳐쥐고 고개를 양쪽으로 돌려대던 노하사가..
" 잘 안보인다..이거..근데 확실한 거는 우리 위치는 이미 노출 되어 있고, 저노무 개새끼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것인지, 우리측 피해는 어떤 정돈지 알 길이 없다..
동이 틀 때까지 우리가 살아 있을까?..스무 명 남짓이라 하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 같다..아까 우리가 잡은 놈들이 최소 너댓명에, 후방매복조 친 놈들도
그 정도는 되는 거 같고 유병장이나 내가 잡은 놈 둘, 그리고 전방 차단조들과 교전하고
있는 놈들도 적어도 열 명은 넘는 거 같은데..아랫쪽 박격포 친 놈들..이래 저래 합하면
이백명이라도 해도 전혀 이상치 않다..이거.."
하면서 주절주절 읊어대기 시작했다..
강원도 산자락의 새벽공기는 굉장히 무겁고 밀도가 높다..따라서 소근거리는 소리도
굉장히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되는 편이고, 저 앞이나 뒷 쪽에 이 귀신같은 놈들이 있다면
우리 목소리를 다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뭐..어차피 그래봤자..우리 위치는 다 노출
되어 있으니..
" 노하사, 지금 한가하게 그런 분석할 시간이 어딨노..
아까 얘기한대로 김중사님 비트나 노하사 비트로 각자 움직여야 하는 거 아냐..
아까 우리한테 총질해댄 그 넘들도 대충 정리되거나 자리를 옮겼을 것 같으니,
빨리 옮기자.."
" 가만, 가만, 저 쪽에 뭔가 꿈틀대는게 보인다..슬그머니 우리 매복조 있는 쪽으로
기어 가는 거 같애..저거..김중사님 아냐? "
김중사가 아직 살아있단 말인가..
조금전의 정황으로 봐서는 후방매복조 뒤로 은밀하게 접근한 북한의 최곤지 지랄인지
하는 놈들이 우리 삼인 매복조가 총쏘고 수류탄 던지는 틈과 소음을 틈타서
소음총으로 아군 매복조 몇 명을 사살하고 몇 명과 육박전이 벌어진 것 같은데..
그 때 김중사가 우리를 남겨두고 날듯이 달려 갔고, 가다가 놈들의 소음총에 맞거나
다른 놈들과 격투가 벌어졌을 수 있다..그리고 후방매복조를 공격한 놈들이 다 죽거나 도망치고
난 다음에 혹시나 부상을 입고 비트쪽으로 가려고 용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알 수가 없다..이 어둠속에서는 내게 총을 쏘고 하는 놈들이나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움직이는 물체는 설상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무조건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내가 그런 생각에 총을 다시 거머쥐고 대충이라도 방향을 잡아서 총질을 해야겠다고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니 노하사가 쌍안경을 거머쥔 양손에서 오른 손을 뻗어서
내 어깨를 지긋이 눌렀다..
" 유병장, 조금만 기다리 봐라..움직이는 폼이 부상을 심하게 입은 것 같고,
나도 저게 김중사님인지, 우리 사격에 당한 저쪽 놈들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저쪽은 대충 정리가 된 것 같다..
조금 더 지켜보다가 저리로 자리를 옮기자..그래도 저쪽에 야간조준경까지
달려 있는 케이투가 있고, 우리도 총알을 절반이나 썼고 수류탄도 없다..
동이 틀려면 한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그 때까지 이런식으로 총 쏴대다간
나중에 대검 하고 철모들고 워카발로 싸워야 될 판이다..
저기 가면 그래도 아군이 총 한방 못 쏘고 당했을 것 같으니 실탄이나 수류탄
잔뜩 있을 거다.."
맞다..짬밥은 모자라지만 그래도 부사관 학교에서 제대로 상황판단이나 전술
교육을 나보다는 제대로 받았을테니..듣고 보니 사실 일리가 있기도 하고..
" 노하사, 그라마 언제 움직이는게 좋겠노..진짜 오줌을 질질 싸겠다 "
말을 해 놓고 보니 극도의 긴장감에 엄청나게 소변이 마려웠다..불과 삼십여분전에
설사기 가득한 배변으로 비워냈는데도, 고추를 거머쥐고 동동 구르고 싶을 정도로
요변기가 돌았다..
" 대충 싸라..이왕 이래 된거..언제 바지춤 열고 누겠어?..알아서 해라.."
그래도 명색이 육군 특공대 병장인데 체면을 구기긴 그렇고
아까 우리가 매섭게 몰아친 최초의 전투방향으로 몸을 돌려서
전방주시도 하면서 오른손은 권총손잡이를 꽉쥐고 왼손으로
전투복 바지 앞고름을 풀었다..
노하사가 계속 중얼거린다..
" 아무리 봐도, 김중사님이 맞는 거 같다..이제 막 정중앙 비트로 들어갔다..
더 이상 움직이는 물체는 안 보인다..적은 퇴각을 했는지 이동을 했는지.."
막상 소변을 볼려고 하니 아무리 용을 써도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긴장감이 극에 달하면 요도가 자극되는 것인가?
스스로도 머쓱한 기분에 다시 왼손으로 꼬물 꼬물 단추를 잠그고 노하사에게
" 갈라면 지금 가자, 안그래도 내가 똥 퍼질러 싼 여기 있을라카이 찝찝하기도 하고
불안해 미치겠다.."
" 갈려면 한사람씩 가야한다..둘이 동시에 가다가 공격당하면 이 곳은 저 새끼들이
완전 무주공산으로 설쳐댈꺼고 그러면 이 일대 전체가 와르르 무너진다.."
" 노하사가 먼저 가라..내가 엄호할테니.."
그렇게 노하사가 자신이 매고 있던 광량증폭식 쌍안경을 내게 벗겨주고
다시 한번 정밀하게 후방매복조 방향을 훝어보고는 몸을 굴러서
비트 밖으로 빠져 나가고 최대한 상체를 낮춘 상태에서 이동해 갔다..
그런 노하사를 엄호랍시고 소총을 쥔 상태에서 왼손으로 쌍안경으로 노하사가
이동하는 뒷통수를 보노라니..그나마 한사람이 옆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갑작스러운 공포가
쫙 밀려왔다..동시에 이 골짜기의 냉랭한 기운이 밀집된 형태로 내 몸을 갉아 먹듯이
덮치고 이빨이 마주치면서 달달달 떨기 시작했다..
몸이 떨리니 쌍안경을 통해 들어오는 연초록색 사물들도 자꾸 촛점이 흐려졋다..
- 계 속 9 -
노하사가 후방매복조 비트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도 몸을 굴려 반동을 준다음
비트 밖으로 뛰어 나갔다..몇 발자욱 떼지도 않았는데 아까 노하사 사격을 받고 쓰러진
녀석이 발에 걸렸는지 기우뚱 하고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아..씨바 하고 몸을 일으킬려고 왼손을 앞에 디디는데 뭔가 차가운 금속물체가
만져졌다..대충 쑤욱 더듬어 보니 아주 짧다막한 총이다..쓸데가 있겠다 싶어서
왼손으로 거머쥐고 몸을 일으키는데 제법 묵직하다..
노하사가 이동한 것 처럼 상체를 한껏 낮추고 하체를 부지런히 움직여 가는데
긴장감에 몸이 굳었는지 뻑뻑한 허리에 무릎관절도 삐거덕 거리는 느낌이었다..
약간 오르막을 지나고 몇개의 나뭇가지가 얼굴을 날카롭게 할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대충 이쯤이다 싶어 이동을 멈추고 ' 노하사..노하사~~' 하고 다시 낮은 톤으로 불렀다..
어스럼한 어둠에서 ' 여기..여기..근데 그쪽부터 비트가 있으니 무기될 만한 것들 챙겨와..
특히 스코프 달린 케이투 꼭 챙겨오라고..'
살짝 살짝 감으로 비트의 위치를 더듬대면서 찾아 나갔고..
예상대로 한 비트에 두 명씩 있었던 모양인데..비트에서 핏비린내 비슷한 것 냄새가
역하게 풍겨왔다..누군지 신원을 확인할 방법도 없고 해서 비트 바깥에서 몸을 숙여
손을 이리저리 저어보니 별로 만져지는게 없다..아..시팔..
결국 비트 속으로 다시 몸을 구겨넣고 이리저리 더듬거리면서 찾아낸 것이
K1A 소총 한자루와 누군지 모르겠지만 아군임에 틀림없는 몸에 꺽여저 메여 있는
탄입대 속의 탄창 여덟개, 수류탄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탄창 넣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그냥 야전상의 안쪽에 대충 쑤셔 넣었다..
케이투가 어딨나..아무리 찾아도 없었다..게다가 전우의 시체를 밟으면서 그러려니
몸의 중심도 잘 잡히지 않았고..여긴 없나보다 싶어 횡선을 마음속으로 긋고 다음 비트로
완전포복 자세로 천천히 나갔다..한 손에 총 두자루를 멜빵줄로 거머쥐고
아까 주운 짤다막한 소음총 한자루를 빗겨매고 야전상의 안쪽에
탄창 여덟개를 채워 넣고 박박 기어가자니 가슴팍이 곳곳에 마치고 아릿한 통증에 완전포복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숨을 씩씩 몰아쉬면서 겨우 다음 비트위치 근처로 가니
노하사가 정중앙 비트에 자리를 잡고 ' 여기..여기..' 라면서 불러준다..
내가 방향을 잡고 그쪽으로 가니..
" 지금 김중사님은 어디를 맞았는지 온 몸이 피투성이다..의식도 없는 상태고 "
내가 대충 가져온 소음총과 K1소총 한자루를 비트에 내려 놓고 야전상의 안쪽의
서른발 들이 탄창 네 개를 노하사에게 넘겨주었다..노하사가 받은 탄창을 알아서
탄입대 이 곳 저 곳에 집어 넣더니..수류탄 한 발을 손에 쥐어 준다..
" 이 앞에 김태원 상병하고 황포 일병이 죽어 있다..수류탄은 놈들이 가져 갔는지 없고
케이투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저쪽에 남은 비트에 있었던게 조성훈 병장하고
얼마전 신병으로 왔던 백우람 이병인데..이쪽은 소음총에 당한게 틀림없고, 아마
양쪽은 기습적인 칼 공격에 당한거 같애..그나 저나 김중사님을 어떻게 해야 하나.."
김중사는 비트 오른쪽 흙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데 언듯 봐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김중사를 보니..아이고 니기미..김중사 비트에 있던 무전기를 그냥 놔두고 왔다..
어쩌면 본대하고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통신수단이고, 우리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마지막 장비인데 너무 급하게 서두르느라 그 귀중한 것을 그냥 놓고 왔다..
전방의 역매복 장소에서는 더이상의 소음이 없다..그렇게 콩 볶듯이 바라락 하더니
아군이 전멸했는지 적군이 전멸당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총소리도 사람소리도
없이 무심하게 간헐적으로 저 아래 미시령에서 이 곳 상봉쪽으로 차 오르는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다..내가 노하사의 쌍안경을 벗어주려니 노하사는 됐다는 시늉을 하면서
어느새 김중사의 것으로 보이는 투시경을 들어 보였다..
결국 힘들게 오십여미터를 뒤로 빠졌는데 건진 것은 수류탄 한발과 탄창 네개를 나누어가진 것
밖에 없었다..뭐 이거라도 없는 것 보다는 백배 안심이 되고 최소한 그냥 죽지는 않을 것 같다는
나름의 위로감이 들었다..
문득 매고 온 짧은 소음총을 벗겨내려 자세히 보니 체코제인지 권총 손잡이에 탄창을 삽입하는
형태로 접철식 개머리판이 앞 총구쪽으로 접혀 있었다..처음 만져 보는 무기라 탄창을 어떻게
빼는지 몰라서 그냥 풀어보려고 하다가 비트 앞 쪽에 그냥 내려 놓았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듯 어둠이 다시 눈에 익어 오고..타이맥스 시계를 보니 네시 반이
훌쩍 넘었다..조금만 더 있으면 어슴프레 하나마 여명이 트고 그러면 피아간 식별도 용이하고
지금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구분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하지만 어둠이 주는 확실한 은폐나
엄폐효과는 적이나 우리나 같이 사라지게 되니 내가 겪어야 할 생명의 위협은 별반 다를게 없다..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김중사를 보니 내가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다..총상을 입었는지, 자상을 입었는지조차 파악을 할 수 없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
후레쉬 불을 켰다가는 지금 상황에선 적이던, 아군이던 공격받기 딱 좋은 환경인지라
그렇기도 하고 전문적인 의무교육을 받지 못한, 아니 기초적인 응급조치를 하려고 해도
뭘 해야 할지 머리만 복잡할 뿐 뭔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더 안타깝다..
노하사 말대로 한시간쯤 있으면 어슴프레하게라도 동이 틀 것이고 그 때 전투복을 벗기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맞을 것이고, 미군보병들처럼 응급처치 키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하더라도 나나 노하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출혈부위에 대한 압박조치
정도 밖에는 없을 것이다..
노하사가 전방쪽을 주시하다가 은근하게 말을 전해온다..
" 유병장, 저어기 아까 총소리 나고 불꽃 일었던 역매복 장소 있잖아..거기에 작은 불꽃들이
계속 간헐적으로 일어나는데 한번 볼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까전부터 우리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던 억제된 그러나 희미한
꺽음 소리가 말 그대로 따닥, 따닥..하고 무작위적으로 들려 왔다..
총소리를 보건대 한 두명이 쏘는 것이 아니다..적어도 분대급 이상이 돌아가면서 쏘는 소리..
젠장..저 윗쪽에 배치된 아군 병력만 백여명이 넘는데..어째 아군 총소리는 하나도 안 들리고,
아니 처음에 콩 볶듯이 들리고는 아예 케이원이던, 케이투이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노하사가 걱정하고 내가 우려하던 상황이 맞는 것 같다..
이쪽을 친 녀석들은 죄다 죽거나 이동하고 이제 양쪽의 대규모 병력들이 대량으로 맞붙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저쪽은 쥐도 새도 모르는 기습을 당한 것 같다..아니면 아까 우리들이 친 병력들이
그야말로 미끼였고 본대를 치기 위한 대병력들은 미리 준비를 하고 있다가 아까 최초의 타격을
신호로 동시 또는 아군이 이쪽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뒷 쪽에서 들이친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마 이 상봉지역 근처에서 화암재까지 연결된 매복 루트에 남아있거나 생존하고 있는
매복병력중 남아 있는 병력은 거의 우리 둘 밖에 없다는 얘기인데..
입술이 바싹 마르고 혀안은 아까보다 더 바싹 바싹 타들어가고 다 뱉어내지 못한 흙들이 잇몸사이와
혓바닥 아랫쪽에서 서걱거렸다..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그 물 마시는 동작마저도 이 순간에는
호사스럽게 느껴지고 마치 무슨 죄를 짓는 것 같다..
노하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가 생각하는거랑 내가 생각하는거랑 별반 다르지 않은지..
" 아무래도, 유병장..저쪽 아래 우리가 있던 비트에 김중사님이 갖고 있던 무전기를 가져오자..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니 이거 우리만 달랑 남은 거 같애..신선봉쪽에는 움직임이 없는지..
또 본대가 지원을 오더라도 저 새끼들 병력으로 봐서는 아예 연대급이 통째로 오거나
단단히 준비하고 와야지..어설프게 왔다가는 또 된통 당할 것 같다.."
그렇다..옛날 육이오 전쟁 때 초기에 아군이 싹쓸이 당하다시피 북한군에게 당한 이유가
천하무적급의 T-34탱크도 이유가 되겠지만 아군의 전술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
1개 연대가 당하면 또 1개 연대가 들어가고 또 전멸하면 또 들어가고, 그러다 보니
강력한 적의 사단급 기동부대에 연대급이 들이치다가 차근차근 당하고 만 것이다..
차라리 그 때 사단급 이상을 뭉쳐서 집중적으로 적의 주공을 들이쳤으면 아무리 소련제
탱크가 강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낙동강까지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강하던 미군들도 초기에 똑 같은 전술을 썼다가 대전인가, 금강에서 아예 참패를
당하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저 개새끼들의 숫자가 백여명 또는 이백여명이라면 아예 우리 연대
전체와 인근사단의 포병대, 수색대 애들 모두가 동원되야 할지도 모른다..
일반 보병들도 그 정도 숫자면 감당키 어려운데 저 놈들은 날고 기는 정찰여단 놈들이
아닌가..특전사 1개 대대를 평양지역의 인근에 풀어 놓으면 아마 몇 개 사단이 달려
들어도 완전하게 제압하려면 엄청난 인명손실과 시간피해를 볼 것 과 똑 같은 상황이다..
아군은 강하고 적은 허접하고..아군의 총알은 무한정이고 백발백중이며 적의 총알은
꼭 빗나가는 초등학생적인 사고는 아예 접어야 한다..현실은 냉정하고 지금 땅은
우리 땅이지만 대충 봐도 적이 상황을 거의 통제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놈들은 귀신처럼 빠르고 강하며 비록 총알 맞으면 죽겠지만
어지간해서는 맞추기도, 마주 상대하기조차 힘든 놈들이다..
차라리 우리들에게 케이쓰리 같은 경기관총이라도 있으면 제압사격으로 잠시 묶어나 두겠지만
달랑 두 자루 소총으로는 어림도 없다..마주치면 제대로 붙기도 전에 이마에 총알 박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노하사 말대로 이정도 상황이면 지리 빵이 아니라 연대를 호출하고 군단을 호출해서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저 놈들이 저 정도 병력으로 뿔뿔이 흩어지면 그야말도 강원도 일대는
아비규환이 될 것이고 전방부대를 빼고는 예비사단 전체를 포함해서 전군이
몇 개월 생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걸 막으려면 우선 통신수단 확보가 가장 최우선 과제다..
노하사가 가던, 내가 가던 앞쪽 비트에 있는 무전기를 가져와야 한다..
노하사가 뭐라고 하기전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무전기..무전기..속으로 웅얼거리면서 노하사에게 뒤쪽에 대한 엄호를
부탁하고는 아예 상체를 숙이지도 않고 후다닥 내 달았다..
- 계 속 10 -
다행스럽게도 김중사의 원래 비트에는 조금 전 내가 만졌던 무전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고 엎드린채 몸을 숙여 끌어 올리자니 무게가 꽤나 나간다..
원래 후방매복조의 류영식 상병이 매고 다니던 것인데 아홉명의 우리 매목조장인
김중사가 최고 선임이므로 고정식 비트에서는 김중사가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고
보고 명령수령용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다..
지역대장이상이야 당연히 신형 PRC - 999K를 쓰겠지만 우리 매복조가 쓰기에는
너무 무겁고 이동성이 제한 되어 정말 구닥다리인 PRC - 77모델이 훨씬 편했다..
무게도 절반이고 비록 밧데리 생명이 좀 짧고 기능이 많이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같이 경량으로 움직이는 소부대에서 사용하기에는 전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그래도 무게가 8킬로 가까이 나가는지라..휘청하는 몸을 억지로 가누고 노하사가
있는 비트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노하사가 무전기를 잡기로 하고 나는 아직 뒤져 보지 않은 하나 남은 비트를 향해
다시 부지런히 자리를 옮겼다..
육 칠미터를 가지 약간 땅이 꺼지면서 경사가 시작되는 곳이 나오자..이 곳이 아닌데 하고
눈에 힘을 잔뜩주고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바로 일미터 앞에 상체를 밖으로 내 놓은채
엎드러져 있는 사람형상이 보였다..분명하다..이 곳에서 케이투를 찾아야 한다..
어두움 속에서도 더듬어 본 덩치로 봐서는 오재식 일병 같다..
입대하기 전에 헬스장에서 트레이너로 있었다는 녀석답게 어깨랑 상체근육이 유달리
발달해 있었던 녀석인데..붙임성이 좋아서 이등병들도 잘 따르고 병고참이나 부사관들도
유달리 이뻐하고 했던 녀석인데..하고 전우를 잃은 설움이나 슬퍼할 겨를도 없이
비트 안쪽을 휘이 저어 보았다..키가 작은 내가 휘이 저어봤자 비트 바닥까지 손이 닿을 수는
없어서 다시 몸을 구부려 살포시 비트 안으로 내려서자 비트 안에도 한 명이 엎어져 있었다..
모양새가 꼭 뒷통수에 총을 맞은 것 같다..부르르 치가 떨려 오기도 하고, 그래도 매복훈련을
제대로 받은 특공대 병력이 이렇게 손도 쓰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한 것을 보면 저쪽 놈들이
얼마나 대단한 새끼들인지 새삼스럽게 무섭기도 했다..
오재식 일병하고 같이 매복을 섰으면 나보다 한달 후임인 정영만 병장일텐데 하는 생각에
엎어져 있는 상체의 겨드랑이를 양손으로 걸고 오른쪽으로 뒤집고..바닥을 손으로 짚으면서
훝었다..바로 손에 잡히는 것이 무게로 보나 길이로 보나 케이투 소총이 틀림없다..
그래 맞다..정영만 병장이 그래도 우리 대대에서는 저격수급 특등사수였지..
왼손으로 소총을 집어들고 오른손으로 더듬어 보자 과연 야간투시경이 달려 있는 그 케이투가
맞다..탄창은 옛날 구식 스무발 들이 탄창..
정밀한 사격을 좋아하는 특등사수들은 서른발들이 탄창보다는 이 짧다막한 스무발들이 탄창을
더 선호한다..엎드려 쏴 자세때 탄창의 길이가 짧아 상대적으로 정조준 자세를 취하기 편하기도
하고..또 상대적으로 단발 사격을 하기에 열 다섯 발 정도를 재워 넣는 20발 들이 탄창에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케이투 소총을 어깨 너머로 가로 메고 정병장과 오일병의 몸을 더듬어 여분의 탄창과 수류탄 세 발을
더 챙겼다..이제 노하사나 나나 당분간 실탄이나 수류탄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다시 노하사가 있는 비트로 돌아오니 노하사가 별 말이 없다..
" 노하사, 무전연락 해 봤어?..뭐라 그래..상황이 어떤거야? "
잠시 내 푸념어린 질문을 듣고 있던 노하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유병장, 잘 들어라..대충 두 군데 무전통신을 했는데 지금 상황이 말이야.."
- 계속 11 -
내가 남은 비트를 찾아서 K-2소총 챙기고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에 노하사가
파악한 정황은,
지금 미시령과 대간령 사이의 상봉,화암재,신선봉에 정찰여단으로 추정되는 괴한들
수백명이 떼거리로 잠입을 했고 이 일대에 매복하고 있던 우리 1대대 병력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어디론가 집결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역매복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대부분의 아군 병력이 최초 접전에서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대간령쪽으로 철수를 한 상태이며
교전과정에서 서른 명 남짓의 아군이 전사 또는 실종상태로 파악된다..
여기에는 미시령에 박격포 진지를 구축하고 조명탄 지원을 하던 중화기 병력도 포함되며..
박격포와 포탄 수십발은 탈취된 상태로 사라지고 없다는 것..
대대장과 지역대장들 대부분은 대간령에서 마산봉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계속 적들이
따라 붙으며 접촉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어쩌면 우리 대대전체가 매복진지에 투입되기
전 적들이 이미 교묘한 비트를 구축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는 것..
노하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왜 이렇게 상황이 전개되었는지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면 노하사와 내가 있는 이 쪽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인데..문제는 미시령을
지키고 있던 박격포반을 타격한 적들이 조만간 이 곳 상봉쪽으로 올 확율이 매우 높다는 것..
고도로 훈련된 저 놈들이라면 미시령고개에서 우리가 있는 이곳을 지나는데
이십여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고, 시간의 흐름을 따져 보건대 조만간 이곳을 지날 것이다..
다만 소총만 달랑 쥐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알아서 생존하라는 지침뿐이었다..
잘됐다..오히려..괜스리 저새끼들 잡겠다고 설쳐대다가 이마빡에 총알 박히고 목줄 따이는 것
보다야, 비트에 몸 수그리고 조용히 있자..일대 일로 상대하기도 버겁기 그지 없는 놈들을
떼거지로 상대해야 한다면 장렬한 전사, 특공용사의 혼..이런 거 보다는 그냥 내게는 쓸데 없는
개죽음일 뿐이다..
멍한 상태에서도 지금의 상태에서 최대한 나의 안전과 귀향을 먼저 생각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일단 우리가 살아 남아야 지금 죽어가는 김중사도 살리고..
저 떼거리 저승사자들은 뭐..특전사나 우리 연대 다른 대대, 항공대, 포병대, 수색대나
훈련 잘 받은 예비사 보병들이 알아서 하겠지..우리가 나선다고 뭐 상황이 결정적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이런 저런 잔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데, 노하사가 마치 내 머리 속에 들어와 보기라도
한듯이..무겁게 입을 뗀다..
" 틀림없이 내 생각에는 저놈들 집결지는 상봉 주변이 될거다..그 곳에서는 미시령 좌우 도로가
전부 다 보이고, 근처에 샘터도 있지..바위들 많아서 은폐,엄폐하기 좋지 사방으로 조망이 터져서
헬기 강습도 다 감제할 수 있지..황철봉 능선도 다 꿰 뚫을 수 있고 화암재에서 올라오는 그 험한
길이나 화암사에서 올라가는 그 길로 우리 병력 올라오는 거 다 보고 할 수 있다..신선봉에서
직접사격하기에는 너무 멀고 또 신선봉까지 무거운 중화기 운용하기도 만만찮을거고.."
맞다..그래 네 말이 맞는데 말이야..우리는 뭘 해야 되?
그냥 비트 뚜껑 닫고 조용하게 있자..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둘다 목따이고 피 쏟으며 죽을뻔
했잖아..나머지는 다른 놈들이 알아서 하라고 해..너나 나나 둘이서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어..
하는 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쨌던 하사계급장을 달고 있는 노하사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노하사가 오른손을 뻗으며 나를 자제시켰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추위 때문인지 죽음에 대한 공포때문인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고 있었던 모양이다..다시 그 손을 입에 갖다 대면서 침묵을 요구했다..
뭔가 좌측방 전면에 잔잔한 움직임이 보였다..이제 먼 산자락에는 불그스레한 빛이 돌면서
이제 곧 동이 트려나 보다..그래도 아직 사물을 대충이라도 파악하기에는 이 산골짜기의
어둠은 깊다..
사르륵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노하사가 넘겨준 쌍안경을 들여다 보니 뭔가 부지런히
그러나 아주 절제된 형태로 아까 우리가 최초로 사격했던 구역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렴픗이 보이기 시작했다..하나..둘, 셋, 넷..내가 헤아리다가 곧 이 카운팅이 아주
쓸모 없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이미 우리가 어떻게 해 볼 만한 숫자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 새끼들이 저 아랫쪽 미시령 박격포를 친 놈들이 틀림없다..등에 60밀리로 추정되는
박격포신을 횡으로 걸치고 가는 놈이 두 놈 정도 되고..나머지 열 댓명은 이 쪽 상황이
정리된 줄 아는지 별다른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또 절대침묵을 지켜야 한다..뭐 다른 이유보다도 괜히 우리위치 노출시켜
봤자..죽음의 사신이 득달하듯이 달려들게 뻔하다..
열 댓명의 적들이 꼬리 아홉개 달린 구미호 둔갑하듯이 휘리릭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제서야 새삼스럽지만 내가 상대하고 앞으로도 어쩌면 내가 죽을 때 까지 상대해야 할 놈들의
훈련상태를 알 수 있었다..우리도 엔간하게 산을 타고 넘었지만 저 넘들은 박격포를 메고도
마치 우리가 맨몸으로 평지를 걷듯이 거침이 없다..지독한 놈들이다..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소리도 거의 나지 않고..아마 제대로 은밀하게 침투한다면 코 앞에까지 와도 잘 모를정도로 ,
어쩌면 내 목이 따이고 난 뒤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채 죽어갈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놈들의 선두조가 아까 처음 우리가 총알과 수류탄을 퍼부었던 근처로 가자..몇 명이 몸을 숙이고
몇가지 장비들을 챙긴다..총이나 탄약..뭐 이런 거겠지..그렇다면 우리 세명이 처음에 취한 조치가
그래도 전과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이 살벌한 순간에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옆의 노하사는 계속 집중해서 그쪽을 관찰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신중해서 역시 계급이
사람을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스럽게 느낀다..
동료들의 무기나 이런 것들을 여러명이 분산해서 주섬 주섬 챙긴 놈들이 다시 상봉정상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하자..내가 나즈막하게 목소리를 낼려니..노하사가 오른 손을 뻗어 정확하게 내 입을
가로 막는다..뭐야? 이거..저 정도 거리면 잘 들리지도 않을텐데..순간 기분이 나빴지만 그렇다고
주먹을 날릴 수도 손을 홱뿌리치기도 머쓱해서 가만히 있었는데..바로 그 이유를 알았다..
아까 그 놈들이 이동해 온 경로에 또다시 사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물체가 이동하는 것이
감지되었다..햐아~, 정말 무서운 놈들이다..앞에 놈들을 본대라고 생각하고 혹시라도
우리가 먼저 공격했다면, 바로 우리위치를 파악하고 뒷통수를 때릴 놈들을 후미졸로 운용하다니..
후미조는 네 명 정도 였다..그들은 더 신중하게 좌우를 살피면서 천천히 그러나 꼭 귀신 영화에
나오는 산발귀신이 둥, 둥, 둥 순간이동을 하듯이 날렵하게 본대의 뒤를 따라잡았다..
수 백명이라더니 정말 저놈들 병력운용하는 것이 수천명 운용하듯이 한다..
섣부르게 올커니 하고 보이는대로 앞의 전초나 본대를 치다가는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이
되어 등뒤에서 목을 따거나 소음총으로 뒷통수에 총알을 박아 넣는 킬러들이다..
비록 적이지만 감탄할만한 전술적 운용이요..아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후미조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노하사가 입을 연다..
" 이거..이거..저놈들 다시 모여서 자기들끼리 인원파악하고 병력 추스리고
쫘악 산개하면 우리 군단전체가 동원되도 올겨울내에 다 잡기는 어렵겠다..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네..유병장~, 우리가 뭘 해야 될까? "
내가 잠시 뜸을 들이고 의견을 꺼냈다..
" 하긴 뭘해?..상황이 안보여 저 새끼들 숫자가 우리의 수십배는 되겠다..우리 눈으로
본 것 만도 스무명 정도에 노하사 말대로 별도의 본대가 있다면 수백명일텐데..
우리 부대는 후퇴하고 있는 중이고..뭐..그냥 머리 처박고 있자..그래도 여기가
우리 땅인데 뭐 군단에서 알아서 하던지 날고 기는 특전사들이 오던지..요 아래
북파부대 선생님들이 투입되던기..F 15나 팬텀기로 폭격을 하던지 알아서 하겠지 뭐..
우리가 람보도 아니고 터미네이터도 아니고..그냥 여기서 상황 풀릴 때까지 게기자.."
" 뭐?..참 폭격..그래..네 말이 맞다..너 상봉의 GPS 위치코드 알고 있지?..다 외우고
있자나..그렇지..그러면 되겠네..시간 타이밍만 잘 맞추면 저 놈들 한꺼번에 몰살
시킬 수 있겠다.."
" 와..뭘할려고..이 일대 GPS 좌표야 내가 빠싹하게 다 외우지만 그거 알아서 뭐 할려고? "
" 유병장..잘들어..이제 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 놈들 뒤를 따라 간다.
무전기는 내가 들테니..거추장 스러운 것 다 빼고..너는 케이투를 잡아라..
김중사님은 여기 두는 것이 그래도 제일 안전할 것 같다..우리는 저놈들
뒤를 밟아서 우리 추측이 제대로 맞는지 확인하고 혹시라도 차질이 나면
이 무전기로 상황을 계속 전하면서 화력유도를 하게 될거야..
우선 상봉정상 근처에 저놈들이 집결하면 우리가 무전으로
군단전체의 대규모 포병화력을 유도하기 위해 우리는 암봉 근처에
숨어 있으면서 상황을 주시한다..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조치를 그 때 그 때
맞추면서 한다..지금 간다..아까 저놈들 움직이는 것 보니..우리가 뛰어가도
못 따라잡을 것 같지만..일단 암봉까지 가자..총 챙겨라.."
노하사는 별도의 지시나 명령을 하지 않고 다시 몸을 수그려서 무전기를 잡았다..
- 계 속 12 -
놈들의 후미조가 완전히 사라지고도 또 다른 마지막 후미조가 있는가 싶어서
천천히 이동하면서 뒷쪽을 살피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우리 둘도 속도를 냈다.. 이 일대야 우리가 상시로 밥먹듯이 들락거리는 곳이라서
아무리 어두워도 별도의 랜턴이나 불빛 없이도 훤히 꿰차고 다닐 수 있다지만
도대체 저놈들은 눈에 야광주라도 박고 다니는지 마치 제집 안방 다니듯이 거침없이
속도를 뺀 모양이다..가파른 길을 긴장한채로 움직이려니 몸의 피로도가 훨씬 더
빨리 오는 느낌이다..
이제 먼산에 분홍빛으로 물들던 먼동이 제법 밝아져 오면서 어둠의 사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바닥의 돌이나 자갈..그리고 나뭇가지들이 희미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열 보 정도 잽싸게 전진했다가 몸을 낮추고 사주경계를 좌우 앞뒤로 한 뒤
다시 움직이는 형태로 마치 기계처럼 전진 멈춤 사주경계 전진을 계속했다..
앞에 달아뺀 저 새끼들은 아예 우리가 없는양 거침 없이 달아 빼다 보니 거리감은
자꾸 더 멀어지는 느낌이지만 어차피 우리들의 추측이 맞다면 상봉 근처에서 집결할 것이다..
오 분여를 그렇게 움직였을까..
상봉에서 오 분 거리인 암봉에 다다르자 우리 본대 매복조의 처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 등산로라고 하기에는 흔적도 약하고 그저 백두대간 종주하는 산꾼들이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노란색, 흰색 산악회 리본들이 그나마 길임을 알려주는 인적 드문 곳인데..
그 주 등산로 양 옆에 오십미터 간격으로 양쪽으로 지그재그로 형성되어 있는 아군 매복진지와
그 주변에 아군들의 시체가 두 구 씩 너부러져 있었고 드문 드문 길 안쪽에 아군 복장으로
위장했지만 군용 배낭이 아닌 일반 등산용 배낭을 거머진 적의 시체와 아예 등산복 차림을 한
놈들의 시체가 여기 저기 자빠져 있었다..대충 봐도 열 놈 좀 넘어 보인다..안타깝게도 아군들은
대충 헤아려 봐도 스무명 넘게 당한 것 같다..속이 너글거리는 분노..억울한 감정이 치솟았다..
여기서 아까전에 봤던 불꽃과 콩 볶는 총소리와 소음총의 둔탁한 소음이 들려 왔던게다..
아마 암봉 주위에 아군 주력대가 있다가 전초 매복진지가 기습을 당하고 양방향에서
야차처럼 저 새끼들이 야금 야금 치고 들어오니 지역대장들이나 대대장이 일괄 퇴출을
명했던 모양이다..정신이 없으니 지리 텐이 수신을 못한거고..상황보고는 대충 되었는지
지리 빵이 우리더러 움직이는 것들은 모조리 쏴라 하고 명령을 내린거고..
적의 꽁무니를 따라 나름대로는 은밀하게 이동하면서 보여지는 정황을 보니 이전의
전개상황이 머리에 착착 정리가 되었다..
계속 긴장한 상태에서 길을 따라 반복적인 움직임을 계속하면서 오른 쪽을 바라보니
속초시를 끼고 있는 동해 바다 저 지평선 끝에 불그레한 빛이 너물너물 꿈틀거린다..
조금만 있으면 일출이다..그 전에 우리도 암봉 근처의 바윗틈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따라가다 보니 이동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암봉정상을 눈 앞에 둔 상태에서 다시 한번 전방을 세밀하게 살피고 노하사와 나는
이전의 훈련 때 지역대장의 눈이나 선임하사의 눈을 피해 몰래 짱박혀서 담배를 피우던
돌출바위 아랫쪽의 옴폭하게 들어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숨돌리느라 내가 수통의 물을 꺼내 벌커덕 벌커덕 마시고 노하사에게 넘겨주자,
노하사도 목이 말랐는지 한참 동안이나 꼬르륵 꼬르륵 하고 물을 시원스레 들이켰다..
갑갑했던 몸에 차가운 생수가 들어가자 정신도 번쩍 드는 느낌이 들고 불현듯 공허한
허기가 돌았다..하지만 레이션이나 전투식량은 모두 우리 비트에 고이 모셔져 있으니
배고프다는 생각을 할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바위 틈사이로 적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던 노하사가 말을 건넸다..
" 유병장, 아까 알고 있다던 상봉 정상의 좌표는 확실하게 맞는거지? "
내가 대답대신 눈을 약간 부라리자 곧바로 별말 없이 노하사가 무전기 키를 들었다..
하기야 나보다 그 구닥다리 무전기 매고 오느라 네가 고생 더 많이 했다..
무전기를 호출하는 노하사를 잠시 바라보다가 바윗틈사이의 구멍을 통해 상봉의 주변상황이
어떤가를 보니, 과연 우리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는지 아군 복장을 하고 원색 배낭을 매고
소총을 아무렇게나 거머쥔 놈들, 아까 자빠져 있던 등산복 차림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놈들아
마구 섞여서 상봉주변에서 몸을 낮춘채 대기하고 있는 놈, 상봉 정상에 방어선을 형성하려는지
주변의 바윗돌이나 너덜겅 지대 사이에 몸을 숨기고 거총하는 놈, 아예 자기 집 마당인양..
바위위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는 놈, 망원경을 이리 저리 돌리면서 살피는 놈, 길다란 드라구노프
저격총처럼 보이는 소총을 바위 사이에 놓고 만지작 거리는 놈들 해서 어림잡아도 백 여명이
훨씬 넘는 놈들이 상봉 정상과 그 주변에 포진해 있었다..
이쪽 암봉에서 보이는 숫자가 그 정도면 상봉과 화암재, 신선봉 사이에 깔린 저 새끼들 숫자도 대충
비슷하다고 보면 그야말로 대대병력이 총동원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랄..뭐? 스무 명 남짓이 땅굴입구로 들어갔다고..하여튼 그놈의 군사위성인지 하는 물건의 정확도야
인정을 하겠지만 저 교활한 놈들이 군사위성이 자기들을 감시하는 시간대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고,
철저하게 위장된 숫자로 아군의 소극적이고도 제한적인 반응을 고의로 유도한 것이 틀림없다..
" 설악 빵..설악 빵..당소 지리 삼 오버 "
" 치이익~ "
노하사가 주파수를 확인하고 맞춘 뒤 무전을 개방했다..다행히 바람은 내륙에서 바닷가 쪽으로
불기 때문에 우리의 작은 소음이 오백미터 이상 떨어진 저놈들에게 들릴 일은 적어 보였다..
내가 궁금증에 조금 짜증스럽게 물었다.
" 어디다 연결할라고? "
노하사가 수화기에 손을 대고 막으면서 내게 단호하게 말한다..
" 내가 신호를 주면 천천히 끊어서 상봉정상의 GPS불러..또박 또박.."
" 지리 삼, 지리 삼..당소 설악 빵..설악 빵.."
" 당소 지리 삼..좌표 부를테니 정확하게 십 분 후에 이쪽으로 몽땅 퍼부어라..오바.."
" 치이익..칙..칙 "
으잉~? 설악 빵이면 연대장 호출인데..야가 뭘 할라고 이러나..그냥 머리나 수그리고 있지..
" 지리 삼, 지리 삼..뭘 퍼부으란 건가? "
" 지금 가용한 모든 화력을 이쪽으로 퍼부어주기 바란다..오버 "
" 상황이 어떤지 상세하게 보고하라..오버.."
" 지금 설명할 시간이 없다..무조건 10분 후에 이 좌표로 쏟아붜라..오바.."
" 지리 삼..지리 삼..무슨 일인가..다시 설명.."
노하사가 열이 받았는지..억지로 목소리의 톤을 낮추면서 다시
" 지금 긴급상황이다..가용한 모든 화력을 지금부터 부르는 좌표로 날려라..
십분후..십분후다.."
그러면서 나에게 GPS 좌표를 부르라는 신호를 한다..
내가 심호흡을 하고 수 만번도 더 외웠던 상봉의 GPS 좌표를 불렀다.
처음이야 경도가 나오니 손으로 아래위로 그으면서 차분차근 하게
' 삼..여덟..둘..삼..여섯..아홉..둘 ' 그리고는
다시 손을 좌우로 그으며
' 하나..둘..여덟..둘..여섯..삼..오..여섯 '
그리고는 양손으로 엑스표시를 하면서 끝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노하사는 그대로 숫자를 반복하면서 무전기 너머의 설악 빵에게
송신을 두 번 더 정확하게 마쳤다..
내가 혹시라도 틀렸나 싶어서 다시 더듬어 보았으나 맨날 후임들에게 자랑인양 우리 작전지역과
휴전선 넘어 작전지역의 주요 지역들에 대한 좌표 암기를 그렇게 해 대었고..사실 이 분야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이 나의 뇌 어딘가에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에 틀릴 일이 없었다..
노하사가 다시 차분하게 무전기를 내려놓고 내게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 유병장~, 나도 네가 나보다 군대 짬밥을 더 먹은 거 잘 알고 있다..그리고 지금까지 너나 나나
잘해 왔고..앞으로도 잘해 갈끼야..그래서 말인데..지금부터는 아무리 내 생각이 어떻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내 명령을 따라줘야 한다..그래야 니도 살고 나도 산다..알겠나? "
이짜식이 와 이라노..나도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인데 새삼스럽게 명령이라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약간 인상을 찌푸렸는지 노하사가 눈을 부라리며 다시 다짐을 새긴다..
" 들어봐라..그래도 나는 하사다..니는 병장이고..나는 너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고 니는 내 명령을
따라야 한다..죽을 짓은 안시킬테니 그것만 약속하자..같이 살아야 되지 안그래?"
야가 와 갑자기 이러는지 속내야 자세히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 이 판국에 짬밥과 계급..그것도 한 끗차이의
계급을 가지고 싸우거나 거부감을 가질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그냥 말대신 눈으로 껌뻑하고 고개를
까딱하면서 그러마 하고 사인을 보냈다..
" 지리 삼, 지리 삼..당소 설악 땡~"
노하사가 수신기를 다시 집어들고 응답한다..
" 설악 땡, 당소 지리 삼 감도 양호..오바.."
" 당소 한라 땡에 요청..모든 돌멩이 다 날린다..이티에이 오땡땡.."
한라 땡이면 군단사령부다..그러면 군단예하 포병여단이 나선다는 얘긴가?
또 예하 사단 포병들 다 동원되는 건가..아니다..사거리가 한계가 있으니..
이쯤이면 둘 사단이나 을지..혹시라도 백두산까지 가능할랑가?
나 혼자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는데 주변 사단들이 K-9 자주포를 가지고 있으면 보다 정확한 화력투사가
가능할텐데..105밀리 곡사포나 구식 견인포로는 사거리 때문이라도 잘 안될건대..
군단에서야 구룡인지..구렁인지 다연장이 날라 올거고..
잠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155밀리면 살상반경이 50미터가 넘는데, 구룡이면 몇 밀리더라
그거 중급 로켓이면 화력이 155밀리하고는 차원이 다른데..단 몇 발이라도 이쪽 암봉 쪽에 떨어지면
노하사나 나나 시체는 커녕 살조각도 못찾을텐데..
노하사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적은 대대급을 넘어보이는 아주 고도로 훈련된 놈들이고
지금 저렇게 집결하고 있을 때 잡지 않으면 정말 상상하기도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저 등산복으로 위장한 놈들이 백두대간을 타고 쭈욱 남진한다면..지리산 자락까지 뚤리는 것은 시간문제고..
지역의 향토사단으로 저놈들을 막기에는 택도 없다..그러면 우리 연대나 특전사..심지어 해병대까지 모조리
투입되어야 하는데..그것도 이제 곧 닥칠 엄동설한에..이 정도면 삼척,울진 지역에 제한된 무장공비 사건이나
1.21사태와는 질적으로 다르고 96년에 강릉에 들어온 몇 몇 공작조들하고야 규모면에서 세상을 뒤집어 놓을
사건이다..
그래..오늘 여기서 눈감자..어차피 포탄에 맞아 죽으면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을텐데..
노하사가 무전기를 구석으로 밀어 놓고..슬그머니 바닥에 엎드린다..
어쩌면 우리 둘이 들어 앉아 있는 이곳은 직격탄만 맞지 않으면 살아서 돌아갈 확율도 있을 것 같다..
윗부분은 몇 십톤짜리 거대한 바위가 지키고 있고..사방..우리가 들어온 입구만 빼고는 역시 바위가
중첩되어 있으니..하지만 지대가 너무 높다..상봉과 거의 같은 높이라 관측하기는 좋지만 군단포병의
거대화력이 떨어진다면 어찌될지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자..나도 자연스럽게 구석에 밀쳐놓은 무전기를 우리가 들어온 입구쪽으로 옮겨
놓고..관측하기 좋은 구멍에 쌍안경을 들이대고 조금 있으면 온천지를 뒤 흔들 폭죽놀이나 구경해야겠다..
노하사는 마치 자신이 할 일을 다 한양..아예 두 발을 꼬고 양손으로 나의 K1A 소총을 품안에 안고 드러 누워버렸다..
나는 졸지에 내 총을 노하사가 가져가 버렸으니 길다란 K-2를 왼팔에 꼭 끼고 오른 손으로 쌍안경을 들고 상봉쪽을
계속 주시했다..
단 몇 분이 이렇게 긴가?.. 일각이 여삼추라 하더니 정말인갑니다..
다시 엎드린 상태에서 왼손을 더듬어 수통의 물을 꺼내 몇 모금 꿀꺼덕 마시는데 바람소리와는 다른 다소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 왔다..
본능적으로 ' 왔다~!!! ' 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두손으로 철모를 감싸면서 고개를 숙였다..
- 계 속 13 -
누군가 아주 멋들어지게 휘파람을 분다..그 휘파람 소리가 고출력 앰프를 통해
초대형 스피커로 토해지는 소리..휘이이이~~~..
그리고 엄청난 충격과 폭발음이 들릴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휘파람은 길게 이어지고
" 빠바박~~..빠박..빠박..빠닥.." 하면서 마치 나무조각 두 개를 수십명이 거머쥐고
마주 치는 소리 같은 것이 연속해서 들렸다..
대지를 뒤흔드는 폭음이 아니라..그냥 공기를 찢어대는 소음이 계속해서 연이어 이어지고
있었다..가끔씩 나와 노하사가 몸을 숨기고 있는 바위쪽을 강하게 때리는 날카로운 마찰음도
들리고..생각보다 약하긴 했지만 막고 있는 귀가 다 먹먹할 정도의 폭발음이 나기도 했다..
' 뭐 이래..군단에서 모든 돌멩이를 다 쏜다면서 소리가 뭐 이래..? '
' 몸을 울리는 충격파도 없고..전부 불발탄인가? '
파열음이 있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충격파도 적었고 그 소음의 크기도 아무리 귀를 막았다지만
예상보다는 훨씬 미미해서..내심 궁금해졌다..그래서 슬그머니 아까 보았던 바위 틈새로 고개를
들어서 내다보니 땅이나 바위에서 직접 맞아 터지는 포탄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가 공중에서 흰연기를 입체적으로 내뿜으면서 터지고 있었다..상봉 정상에서 이 곳 까지
직선 거리가 어림잡아 사백미터 정도 될 텐데..나와 노하사가 있는 이곳 바위틈 은신처에는
주 포탄이 터지질 않았고 상봉정상을 주변으로 어림잡아서 반경 이백여미터 정도에
바로 그 상공 오미터에서 십미터 사이에서 계속적인 공중폭발이 일고 있었다..
맞다..근접지연신관인가 하는 그 포탄이구나..땅에 닿은 충격으로 폭발하는 것이 아니고
미리 입력해 놓거나 거리 감지 센스에 의해 땅에 도달하기 전 일정 높이에서 폭발하고
강철의 파편을 흩뿌리는 포탄..
자세히 보기 위해 쌍안경을 다시 들고 상봉정상쪽을 바라보니 아까 그 많던 놈들이 아예
다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흰연기만 자욱한 상태에서 계속 빠바박 하면서 포탄들이 공중 폭발하고
있었다..전부들 바위틈에 숨었을텐데..저렇게 공중에서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면..노출된 곳은
무조건 맞는다고 봐야한다..
' 아이고..꼬방시다..요놈들..그러게 왜 여기까지 와서 그 지랄이냐..지랄이..'
어쩌다 잘 못하면 내가 있는 이 곳에도 오탄이 날라 올 수 있다는 위험도 잊은채 나는 아예
상체를 드러내 놓고 망원경으로 이 죽음의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맹렬하게 터지던 포탄들이 일순간 잠잠해지고..적막한 순간이 찾아왔다..
세상을 아작 낼듯이 빠작 거리던 소리의 흔적이 마치 귀속에서 메아리치듯 환청처럼 들렸지만,
눈에 보이는 폭발은 분명 없었다..에게게..이게 다야?..겨우 이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혹시라도 생존자가 있나 싶어서 계속 둘러보고 있는데
이번에 들리는 휘파람 소리는 훨씬 더 무겁고 어떤 풍압마저 느껴질 정도의 바람소리를 동반하고 있었다..
' 아이쿠야..이거 구렁이구나..' 구룡 다연장 로켓이 쏟아지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포탄보다야 대구경 로켓이니 화력도 더 클 것이고 포탄처럼 정밀하게 때리는
사격이 아니기에 다시 몸을 바위틈사이레 감춘채 눈만 빼곰하게 내밀고 바라보고 있는데,
끼이이 하는 굉음과 함께 상봉 정상 왼편에 거대한 폭발이 일었고 겁대가리 없이 상체를
내밀고 희희낙락하던 내 몸이 갑자기 누군가가 거칠게 밀어제끼듯이 뒤로 히꺼덕 넘어갔다..
어..어..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몸을 잡고는 바로 바닥으로 엎드리게 했다..
그리고 우리가 숨어 있는 바위 틈을 마치 집채만한 망치로 강하게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이 엎드린 내 내장을 뒤흔들고..바로 귀가 멀듯한 엄청난 폭발음이 고막을 터지게 할듯이 할퀴고 지나갔다..
귀에서 삐이~ 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속이 울렁거렸다..뭐야? 도대체 뭐길래 이런 말도 안되는
충격이 다 있어?..그리고 곧이어 정신도 차리기 전에 아까 보다는 조금 덜한 폭발음이 한발, 두발,
연이어서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처음의 폭발소리보다 조금 작은 듯한 폭음이 들리고 또 그것보다는 작으면서도 다발성의
폭발음이 어지럽게 불규칙한 패턴으로 지속되었다..그리고는 다시 고요한 적막의 공포스러움이
주변을 감쌌다..
겨우 몸을 다시 추스려 일으켜 세우면서 뭐가 어찌된 것인지 상황판단을 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아까의 그 거대한 폭발은 직선거리로 사백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 둘의
몸뚱아리를 마치 종이짝 흔들듯이 휘둘러대던 위력이었다..
노하사도 어안이 벙벙..나도 정신 나간 놈 처럼
멍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둘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다시 그 바위틈으로 상봉방향을 내다봤다..
맙소사..도대체 뭐가 폭발했길래 상봉방향은 물론이고 전방 전체가 거대한 연기에 휩싸여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포격이 끝난건가?..노하사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니..노하사도 완전 한달간
잠도 못잔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다..
저기에 우리가 없어서 천만다행이다..개미새끼 한마리 살아남지 못할꺼야..
노하사가 마치 오랜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 저거 아무리 봐도 에이텐가 나이텐가 하는 뭐 그거 같다..뒤에 터진 건 다연장이고..
군단에서 힘 제대로 썼네..대단하다..대단해..정말 유병장이나 나나 몇 십미터만 더 저쪽으로 가 있었어도
오장육부가 다 파열되어 피 쏟으면서 즉사했을거야..엄청나네.."
잠시 그렇게 연기가 바람에 스멀 스멀 날려가고 십여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멍하게 뭘 해야 할지도 잊은채, 아니 판단조차 하지 못한채 원자폭탄을 맞은 것 처럼 희뿌연 자욱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봉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마산봉 방향에서 검은 점 몇 개가 천천히 이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이고..
곧이어 타타타타 하는 헬기 특유의 투박한 로터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유하사와 내가 서로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거의 동시에 내 뱉은 말이
" 야..저거 강습부대다..우린 살았다~!!! "
불과 십여분정도의 집중포격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죽음의 땅..상봉에 아군의 헬기가 날아오고 있다..
조그만 점처럼 보이던 것들이 점점 웅장한 소리와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맨 앞 쪽에는 날렵하게 생긴 놈 두 대가 오고 있고 바로 뒷쪽에 거의 열대가 넘는 헬기가 날아오는데
아마도 강습병력을 태운 수송헬기일 것이다..앞에거는 분명 코브라가 틀림없고..
뭐 저정도면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 저 새끼들중에 정말 운이 좋아서 살아 남은 놈들이 있더라도
잘 정리해 주겠지..노 하사와 나는 입구에 버려 둔 무전기를 챙기고 나는 케이투..노하사는 K1A를
챙겨들고 바위틈 사이에서 빠져 나왔다..그런데 노하사가 메려고 하는 무전기가 아무리 봐도 아까
모양하고 틀려서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아까 공중폭발 때 날아온 파편 때문인지 윗쪽이 이미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 노하사..그 무전기 한번 다시 봐라..모양새가 아까하고 다르게 파편에 맞은 것 같은데..? "
노하사가 등으로 메려던 무전기를 다시 발앞에 내려놓고 이리 저리 보고 만져보더니..
" 니기미..이거 못 쓰겠다..안쪽에 파편이 박혔는지 작동을 아예 안하네.."
음..파펀이 박혔다?...그러면 아까 입구에 저 무전기를 놓지 않았으면 그 넘의 파편이 우리쪽으로
날아와서 나나 노하사의 몸에 쳐박혔을 수도 있었겠다..무전기자 저정도면 연약한 인간의 살덩이는
아예 찢어놓았을텐데..
노하사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까처럼 다시 내 얼굴을 빤히 보는데 죽다 살아난 바로 그표정이었다..
할 수 없이 무전기를 내려 놓고..혹시라도 저 놈들중에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바위를 하나 넘을 때마다
사주경계를 하면서 아주 천천히 상봉쪽으로 이동을 했다..
아군의 헬기부대가 거의 신선봉에 다다르고 코브라 두 대는 커다란 타원형을 그리면서 엄호대형을 취하고
있었고 손가락 만한 크기의 주력부대가 눈에 아른 거리는데..아무리 봐도 상봉 바로 아랫쪽 커다란 바위
밑에 뭔가 꼬물거린다..
" 어이..노하사..저쪽에 저거 사람 아이가?..뭔가 꼬물 거리는 거..저..저쪽방향.."
내가 노하사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손가락을 가리키니 노하사가 망원경으로 그쪽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 저..저..지독한 새끼..아까 그 지옥불 같은 포격 속에서도 살아 남은 놈이 있네..근데 점마..저거 뭐하는기고?"
내가 얼른 노하사의 망원경으로 들여다 보니 파란색 등산복 상의를 입은 놈 하나가 어깨에 뭐가 통나무 같이
생긴 원통을 걸쳐 올린다..
" 저거 저거..대공미사일 같다..아이면 RPG-7 같은데..맞다 저 새끼 코브라 잡을라고 딱 숨어서 조준하고 있네.."
지독하디 지독한 놈들인거는 그동안의 교육이나 대간첩 작전사례집에서 대충 알았지만, 아까 그 지독한 포격에
정신도 못차릴텐데..어째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군 헬기를 잡으려고 저 지랄을 하네.."
두 대의 코브라 헬기는 아직 저새끼의 움직임을 눈치 못채고 있다..
소말리아 내전 때 미군 레인저 부대가 저놈의 로켓 때문에 그 비싼 블랙호크 헬기 두 대가 떨어지고 스무 명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고 들었는데..그따위 허접한 소말리아 민병대 해적놈들도 헬기를 박살냈다면 저 프로중에서도
최상급 프로들이라면 여축없이 아군 헬기가 당하게 생겼다..물론 한 대가 당하면 다른 한 대가 저 놈을
아주 박살을 내겠지만 그런 유쾌하지 못한 일이 생기게 가만 놔 둘 수는 없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시간조차 없이 나는 내가 거총상태로 들고 있던 K-2를 다시 고쳐 잡았다..
야간조준경이 달리긴 했지만 전문적 저격용도가 아닌 이 부실한 소총으로 약 삼백미터 떨어진 저 놈을
잡을 수 있을까..아니 잡아야 한다..안그래도 알토란 같은 우리 동료 마흔 명을 죽게 만든 저 악마구니 같은 놈이
다시 우리 육군에 몇 대 있지도 않은 저 귀중한 코브라를 잡는 행운을 누리게 할 수 는 없다..
이 총의 원래주인인 정영만 병장은 평소에 공갈같은 소리를 많이 해 댔다..
" 유벰..제가 우리 지역대 저격수라는게 잘 안 믿기는 모양인데..솔까 씀드려서
저 이소총으로 오백미터 밖의 물체도 정확하게 맞출 수 있어요..아..놔..뻥 아니라니까요.."
지금은 저 아랫 쪽 비트에서 엎어져 죽어 있는 놈이지만, 아무리 뻥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내가
오히려 그 말을 정말 더 믿고 싶었다..
노하사가 들고 있는 K-1A로 저 새끼를 맞추기는 언감생심이고 그래도 지금 우리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사정거리가 조금 더 긴 이 소총으로 저 새끼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 헬기 타고 오는 애들하고 안전하게 부대로 귀환하고 집에 돌아 갈 수 있다..
탄창 아래를 탁탁 두어번 쳐주고 가슴 높이까지 오는 바위를 지지대 삼아서 몸을 바위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노 하사도 망원경으로 놈을 주시하면서 옆에서 도움말을 준다..
" 저 새끼도 상공의 코브라의 이동동선을 파악중인 모양이다..아직 이리 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니..
당장 쏠 타이밍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훈련받은대로 왼손을 쭉 펴서 총열 덮개판 아래쪽에 대고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파지한 다음..
조준경의 대안렌즈에 눈을 갖다 대고 권총손잡이를 살포시 잡았다..
" 어..어..유병장..저새끼 완전히 자세 잡았어..빨리 쏴..지금 쏘라고.."
노하사가 갑자기 호들갑을 떤다..하지만 나는 옆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조준경 눈금에 정확하게 조그만 파란색 타겟을 걸쳤다..
그런 다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큰 숨을 서너번 쉬고는 하나..둘..셋..천천히 내쉬면서
나자신도 의식하지 않은채 방아쇠를 당겼다..
" 타앙~!! "
- 계 속 14 -
K-1A와는 다른 묵직한 반동감이 어깨에 전해져 왔고..아주 천천히 허공에 들려진 총구가 서서히 다시 내려오면서
사격전과 똑 같은 자세로 돌아왔다..
' 맞았을까?..아니면 다시 쏴야 하나..? '
노하사가 갑자시 흥분하면서도 낮은 톤으로
" 나이스 샷~!! 저새끼 상체에서 피보라가 방금 피었어..근데 저새끼도 동시에 쏘긴 쐈나 보네.."
내가 대안렌즈에서 눈을 떼고 내가 쏜 방향을 보니 조준점을 잃은 로켓탄이 코브라가 있는 방향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뿌연 배연연기를 내뿜으며 날아가 버렸다..
' 휴우~!! "
' 유병장..너 참 장하다..몇 십억짜리 군용품 하나 살렸네..준사관급 파일럿도 둘 살리고..빙고다..빙고..'
속으로 스스로 대견함을 흐뭇하게 생각하고 코브라 쪽을 보니 갑작스런 로켓이 엉뚱한 방향으로 솟아오르니
뭔가 싶어서 갑자기 타원형 기동에서 산 아래쪽으로 급속기동을 하면서 내려 갔고..거의 주먹크기만하게
다가 오던 수송헬기들도 대형을 흐트리면서 좌우로 산개하면서 개별 기동을 하기 시작했다..
' 젠장..무전기가 없으니 어떻게 소통할 방법이 없네..'
" 노하사..아까 저 놈처럼 아직도 몇 명이 더 살아 있을지 모르니까..우리는 여기서 정찰만 하면서 있자..
괜히 저쪽으로 갔다가 아까 그런 새끼처럼 우리한테 알라봉 쏘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 유병장..아까 솜씨는 정말 최고다..정영만 병장이 아쉬워 하지는 않을 거 같네.."
' 어라..이 친구가 동문서답이네..괜히 더 가지 말고 여기서 적당하게 은폐,엄폐하면서 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이야..내 말은..'
노 하사는 싱긋이 웃으며 다시 앞쪽 바위 틈사이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나갔다..
' 아이구..네 잘났다..그래..이왕 이래 된거..우짜겠노..'
그렇게 다시 말없이 한 오십여미터를 움직였을까?
집채만한 바위를 막 돌아서는데 뭔가 발에 물겅하니 밟혔다..미끄러지는 것을 간신히
주저앉으면서 중심을 잡으려고 왼손으로 바위를 잡았다..그리고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낮추면서 발아래를 보니 그 커다란 바위틈에 피곤죽이 된 시체가 세구나
널부러져 있고 주변의 바위에는 그 시체들의 인체 일부임이 틀림없는 살덩어리가
덕지 덕지 붙어있고 바위 전체가 아예 뻘건 물감을 스프레이로 뿌려 놓은 것처럼
불그스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아마 최초의 포격을 피해 이 틈으로 몰려 들었다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파편에 몰살을
당한 것 같다..녀석들이 들고 있었던 총기는 뜻 밖에도 지금 내가 쥐고 있는 K-2와
모양새가 똑 같았다..
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피가 잔뜩 묻은 소총을 들어보니 분명 아군의
K-2였다..아마 암봉근처의 아군전사자들 것을 들고 왔겠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내려
놓고 다시 바위를 하나 건너뛰는데..이제는 바위 틈과 바위주변에 방금 내가 본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한 형태의 시체들이 뒤섞여 있다..
앞으로 고꾸라져 등판을 보이고 죽어있는 놈..목에 파편을 맞았는지 간신히 살가죽
일부만 몸에 붙어 죽어 있는 놈..몸통이 아예 통째로 날아가고 없는 놈..이제부터는
처참한 도륙의 전시장이 되어가고 있었다..노하사도 바위 하나를 건너뛸 때마다 움찔
움찔대면서 이 눈으로 차마 보기 힘든 지옥의 현장에 몸이 먼저 반응을 해 댔고,
몇 개의 바위를 넘지 못하고 나는 기어이 아까부터 억지로 참고 있었던 욕지기를 더
이상 감내하지 못했다..
우웨엑..커걱..우웩..
새벽부터 먹은 거라곤 수통의 물밖에 없으니 건더기가 나올리는 없고..위장을 뒤트는
고통과 함께 콧물..눈물이 같이 쏟아졌다..
직접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전혀없는 이 불쌍한 두 군인에게 오늘의 새벽과 아침은
너무나 잔인하게 전쟁이나 전투..그것도 대량학살의 현장으로 버무러져서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쓰나미 파도처럼 퍼부어대고 있다..
더 이상 상봉쪽으로 진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겨우 몸을 진정시키고 물 한모금으로
입을 헹구어낸 다음..노하사를 불렀다..
" 노하사, 난 더 못가겠다..이거는 아마 우리가 꿈꾸는걸끼야..꿈이라 해도 너무 잔인하네..
난 더 못간다..노하사도 그만 가자..저기 헬리콥터도 다시 이쪽으로 오니, 쟈들한테 뒷처리를
맡겨두고 고마하자..죽겠다.."
노하사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학살의 현장에 몸과 마음이 마비되는 듯한 충격을 먹었는지,
아니면 아무리 강심장이고 비위가 좋더라도 비록 적이긴 하지만 더 이상 기괴한 형태로 죽어 자빠진
놈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기 힘들었는지..그냥 자기가 서 있던 바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거의 보름동안 강제로 금연을 시켰지만 억지로 참았던 담배인데..이제
그럴 명분도 없고 설사 연대장이 담배를 못피게 해도 지금은 피우고 싶었다..
야전상의 안쪽에 있는 A급 디스 플러스를 꺼냈다..담배를 싸고 있는 비닐을 벗겨내는데 손이 떨리는지
몸이 떨리는지 평소같으면 날렵하게 벗겨내던 그 비닐의 조그만 끝은 손가락으로 잡을 수 가 없었다..
간신히 이빨에 대고 혓바닥으로 그 부분을 확인하고 앞잇빨로 물고 벗겨냈다..X자로 덮여있는 은박지도
손으로는 찢을 수가 없어서 다시 잇빨로 이리저리 둘러대서 겨우 찢어내고는 밑둥지를 톡톡 털어내서
한개비를 입에 물었다..
" 노하사~ ! 담배 한 대 할려? "
내 말에 힘없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고는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목젖이 꿀떡대는 것을 보니 노하사도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물고 있는 담배에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라이타를 켜서 불을 붙이고 노하사에게
줄려고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두 발자욱 앞으로 내미는데..언듯 바라본 노하사의 철모 뒤로
뭔가 튀어나오는 것이 순간적으로 보였다..
동시에 들리는 날카로운 총소리..
" 타앙~!!! "
- 계 속 15 -
날카로운 총성이 울리고 내가 왼손에 든, 노하사에게 건네줄려고 쥐고 있던 담배 연기가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멈추듯이 파랗게 눈 앞에 어른 거리는데 불과 50센티도 안되는
거리의 바위에 주저앉아 있던 노하사의 몸이 잠시 부르르 떨더니 나의 오른쪽 방향 뒤로
서서히 넘어갔다..순간적으로 담배를 버리고 몸을 받아야 하나, 그냥 받아야 하나 하는
갈등을 하면서도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노하사가 온몸의 힘이 다 빠진 상태에서 뒷 쪽에 있는 바위에 넘어지면서 방탄모가 둔탁하게
바위 모서리에 부딛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대로 축 널어져 버렸다..그리고 눈을 부릅뜬 상태가
분명한데 콧잔등의 부위에 작지만 확신한 구멍이 나있었고, 곧 방탄모와 내쪽을 향해 돌린
얼굴 뒷 쪽에서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렸다..
' 이거..이거 뭐야..또 살아있는 놈이 있다는 말인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내가 몸을 재빠르게 낮추고 오른손에 거머쥔 소총을 몸안으로 당겼다..
노하사는 그렇게 죽었다..어쩌면 내가 먼저 당할 수 도 있었는데 정말 치가 떨리도록 지독한
저 불사신같은 놈이 노하사를 먼저 쐈을 뿐이다..
총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으니 거리는 아주 먼거리가 아니다..기껏해야 내가 아까 알라봉 쏠려고
설쳐대는 놈과의 거리를 넘어서지는 않을 것인데, 문제는 방향이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하사는 내 목숨을 두 번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슬퍼하거나 감정에 휘둘려 어줍잖게 나서다가 내 머리팍에 총알구멍 나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도
없고, 어쨌던 하늘에 떠 있는 저 헬기에서 내릴 강습부대 애들이 나를 무사히 구출할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생각을 하고 머리를 써라..유병장..그래야 민지하고 연애도 하고, 집에 가서 삼겹살에
소주도 걸칠 것 아이가..나 스스로를 다시 다독이고 생각을 하면서 숨을 몇 번 크게 들이쉬었다..
너 댓 번 길게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 쉬자..머리가 맑아지고 아까 담배 한가치도 제대로 못 꺼내던
손과 몸이 진정이 되어갔다..
' 헬기들은 분명 신선봉쪽에서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고, 아무리 미친 새끼라도 헬기조종사들이
아랫쪽을 훝어 보고 있을텐데 자기 위치를 노출시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쏘지는 않을 거다..
암봉쪽에서는 우리가 왔으니 그쪽에서 쏠일은 없고 우리의 뒷쪽이기에 노하사의 피탄부위를 보면
분명 앞쪽이 맞고, 동해쪽 바다에서 그런 저격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방향은 분명히 미시령 방향이다..그 방향 밖에 없다..
내가 있는 곳에서 그쪽 방향으로 쭉 가면 이백미터정도에서 절벽이 있으니 이곳에서 미시령 방향쪽으로
최대 이백미터 내에 저 악랄한 새끼가 있다는거다..도주로도 별로 없다..상봉쪽은 헬기들이 접근해오고
있고..절벽으로 뛰어 내릴 놈이 총질을 하지는 않을거면..저새끼는 암봉쪽으로 이동하려고 하다가
노하사와 나를 발견하고 그래도 상체를 훤히 내 놓고 앉아있는 노하사를 저격했을 것이다..'
그러면 저 자식은 분명 암봉쪽으로 간다..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저 놈을 잡기위해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순서는 무엇인지 분명하다..저 미시령방향 절벽에서 암봉쪽으로 가는 모든 바위틈과 틈을
감제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위치를 잡자..헬기부대가 도착하면 어수선해서 저 놈이 빠져 나가기 훨씬
더 쉬워진다..설마 저 강습대 애들이 내 뒷통수를 쏘지는 않겠지..
나는 다시 몸을 최대한 낮추고 바위와 바위 틈사이를 이용해서 암봉쪽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몸을 옮겨 나갔다..녀석도 몸을 드러내 놓고 뛰어가지는 않을 것이고..일단 노출되면 내가 있는 곳에서
백여미터 남짓의 거리밖에 안되니 서로 먼저 쏘는 놈이 이기는거다..
혼자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몸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은밀하게 다시 높은 바위쪽을 향해 옮겨 갔다..
옮기는 중간에도 아까 포격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 자빠진 적들의 시체 몇 구를 더 봤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무덤덤하게 그 시체덩어리를 지났다..
음..여기가 좋겠다..미시령 절벽 - 암봉쪽을 아주 훤하게 내려다 볼 수 있고..태양도 내 등뒤에서 떠오르니
자연적으로 저새끼가 날 본다고 해도 조준사격하기는 힘들끼다..
차가운 바위에 몸을 앞쪽으로 기대고 다시 케이투를 천천히 들고 총구는 가만히 둔채 눈만 돌려서 우측에서
좌로..다시 좌측에서 우측으로 개미새끼 한 마리도 안놓치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살피고 또 살폈다..
그 와중에 잠깐 상봉쪽을 돌아 보니
상봉주위에는 코브라가 정지해 떠 있고 그 엄호 속에서 몇 대의 헬기가 패스트로프로 병사들을
내리기 위한 호버링을 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라도 아까 노하사를 저격한 놈을 놓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에 뒷쪽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끊어
버리고 앞쪽의 바위 틈과 너덜겅지대를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응~?..저기서 뭔가 반짝거렸는데..분명 햇볕에 이슬이 반짝거린 것은 아니었다..백미터 전방 왼쪽의 바위틈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잠깐 보였다 사라졌다..그래서 그쪽을 집중적으로 보면서 망원경을 천천히 들었다 다시
놓았다..아니다..언제 망원경으로 확인하고 총을 쏘나..이 총에는 조준경이 달려 있으니 내가 집중만 잘하면
발견과 동시에 바로 쏠 수 있다..
망원경을 벗어 아예 뒷쪽에 내려 놓고 소총에 달린 스코프의 대안렌즈에 눈을 밀착시키고 아까 순간적으로
반짝거림이 있었던 바위틈 앞쪽을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여섯배 배율이 적용되어 맨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백두대간 산꾼들이 달아놓은 빨간색 리본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다시 조준경으로 확인했다..
너걸겅 지대에도 아까의 참혹한 포격의 흔적..적들의 시체가 군데 군데 기괴한 모양으로 자빠져 있었다..
숨을 쉬지도 않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앞쪽 바위와 돌 틈 사이를 정밀하게 관찰하는데 너덜겅 지대와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 사이의 작은 가지 하나가 아주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 놈이다..놓칠 수 없다..
그 잔가지의 흔들림은 그리 빠르지도 않았고 잠시 끊겼다..다시 몇 미터 앞에서 흔들리고..다시 멈추고를
반복하고 있었다..저 새끼는 아마 감히 내쪽을 다시 쳐다볼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상봉쪽으로는 아군 헬기가 위협적인 로터음을 내며 호버링을 하고 있고 무장병력이 속속 내리고 있고,
나는 아까 자기의 저격에 충격을 받고 대가리 쳐 박고 있으리라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는 절차를 일체 무시하고 아주 낮은 포복자세로 암봉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나는 몸을 다시 일으켰다..그리고 거추장 스러운 조준경을 떼 버렸다..무겁기만 무겁고 지금상황에서는
나의 행동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는다..천천히 왼쪽 가슴팍에 박아 놓았던 대검을 꺼내 총구에 착검을
하고 최대한 조용하게 녀석의 예상 도주로 방향으로 움직였다..
- 계 속 17 -
녀석의 이동 길목에 서서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이 스무발 들이 탄창을 다 비우도록 쏴제끼겠다는
까닭모를 증오심을 가득 품고 제멋대로 자리 잡고 있는 바위들을 돌고 돌아서 아까 노하사와 내가
몸을 피하고 관측을 했던 바위틈 근처에 다다르자..잠시 오목한 바위뒤에 서서 물끄러미 녀석의
예상 이동로를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녀석은 낮은 포복으로 오느라 그냥 서서 성큼 성큼 이동하는
나의 속도에 한참 못 미치는지 오랫동안 집중해서 바라보니 한 오십미터 앞 쪽의 나뭇가지가
불규칙하지만 아주 작게 움직이고 있다..
' 그래 여기면 저 새끼 잡기 딱 좋겠다..아니면 내가 저쪽으로 같이 이동해서 잡을까?..'
보름전만 해도 이제 제대를 꿈꾸면서 답답하지만 이 군생활보다는 훨씬 나을 민간인으로서의
삶..공부..취직을 걱정하던 내가 단 몇 시간만에 수없이 많은 아군과 적군들의 죽음과 그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시체들을 보면서 마치 야차처럼 비록 적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죽이기
위해 독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잠시 나의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지금 한가하게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다..저 새끼가 살아서 도망가면 또 무슨 짓을 할지..저 놈을 잡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병력이 동원되고 희생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잡을 수 있을 때 확실히 잡아야 한다..
막연하게 녀석이 눈앞에 오기를 기다리는 것 보다는 내가 저쪽으로 가서 단 몇 분이라도 빨리
상황을 정리하는게 맞겠다..언뜻 바라본 상봉방향에는 호버링하고 있는 헬기 두 대에서 까만 점 덩어리들이
주렁 주렁 매달려 있었다..패스트 로프로 내려오는지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 때 갑자기 정지상태에서 호버링하던 헬기가 매달려 있던 까만점들의 안전을 무시한채 상봉 아랫쪽으로
꺽어내렸다..그리고 연이어 다시 콩볶는 총소리가 연발로 들리고..주위에 엄호하고 있던 코브라 두 대가
상봉 넘어 화암재쪽으로 급강하 하듯이 내려 꽂혔다..
하여간 지독한 놈들이다..숨어 있다가 아군 병력이 강하하면서 헬기가 정지하자 그 틈을 이용해 기습
공격을 한 것이 틀림없다..저 매달린 점들..나의 동료들은 어떻게 되나?
잠시후 투박한 폭발음이 상봉너머 화암재쪽에서 연이어 들린다..20밀리 기관포로 살아남아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놈들을 깨부수고 있는 모양이다..
뭐..저정도 화력이고, 상황이면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상황종료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나는 노하사를 쏘아 죽인 이녀석만 잡으면 된다..그걸로 나의 역할은 끝나는거다..
다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자 살금 살금 녀석의 이동로 앞을 치고 나갔다..
거대한 바위가 우뚝 서 있고 그 왼쪽은 그냥 봐도 아찔한 절벽길을 물고 있는 곳에서
오른 쪽 옆에 쌍동이처럼 나란히 서 있는 내 키 높이의 바위돌이 보이길래 그 곳으로
몸을 최대한 낮추면서 들어갔다..
숨을 천천히 다시 몰아쉬면서 정신을 차리고자 소총을 꼭 쥔채 속으로 되뇌었다..
' 유병철..유병철 병장..너는 할 수 있다..저 새끼 잡아죽이고 이제 좀 편하게 쉬자..
귀대하면 외출나가서 짜장면도 먹고..라면에 고추가루 풀어서..돼지찌게도 시키고
소주도 한 병 나발 불자..그리고 목욕탕에 가서 보름 묵은 때와 땀을 말끔히 씻고
그렇게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타고 한 숨 길게 자자..그래 하자..지금 하자..'
케이투를 쥔 양손에 힘을 꽉주고 아직 이십여미터 남아 있는 녀석의 이동로 쪽으로
치고 들어가기 위해 거대한 바위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나갔다..
그런데 분명 트여있어야 할 바로 앞쪽에 낯선 사람 하나가 길다란 드라구노프
소련제 저격용 소총을 앞으로 겨눈채 바위 하나를 막 뛰어 넘었는지 중심을 잡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인채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와 녀석의 두 눈이 마주쳤다..녀석도 놀라고 나도 심장이 멎는듯한
놀라움에 눈 쪽으로 모든 피가 쏠리는듯한 느낌에 시야가 잠시 뿌옇게 변하다가
다시 돌아왔다..
거리는 불과 1미터도 채 되지 않고 서로 팔을 뻗으면 어깨를 맞잡을 수 있을정도의
근거리에서 북한의 정찰여단전사와 남한의 특공연대 병사가 딱 마주친 거다..
나도 앞에 총..녀석도 앞에 총..
이건 뭐 조준이고 뭐고 할 것없이 둘 중에 누가 먼저 쏘느냐의 순발력이 자기 목숨은
살리고 상대방은 죽일 수 있는 거린데..뭐..어떻게 할 수가 없다..
몸은 산발한 처녀귀신의 눈을 바라본 것처럼 마비상태고..정신은 혼미하게 도대체
뭘 어찌해야 할지 갈피도 못잡는 상황..이 새끼도 비슷한 모양이다..
멀리서 총질을 할 때야 총질할 대상의 얼굴을 마주볼 일이 없지만 지금은 녀석도 나도
서로를 빤히 쳐다만 본채 단 몇 초의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느낌으로 꼼짝을 할 수가 없다..
아마 절대절명이라는 말이 바로 이때 쓰는 것이리라..
녀석은 키는 거의 나만하다..170전후에 목이 굵고 한국사람에게는 제법 무거운 축에 들어가는
드라구노프를 쥐고 설치는 것을 보면 정찰여단내에서도 총질 하나만큼은 인정받는 놈일거고,
총버리고 맨손으로 붙어봤자..격술 같은 것만 십년이상씩 해 왔을 놈이 특공무술이니,
태권도니 하면서 형위주로 배워왔던 나보다는 훨씬 독하고 잔인한 살수를 몸에 익혔을 것이다..
녀석도 눈만 꿈뻑 꿈뻑하는 것이 나의 오른쪽 사선방향으로 비껴져 향하고 있는 총구를 돌리는
순간 역시 자신의 오른쪽 사선방향을 비스듬하게 향하고 있는 내 K-2소총에서 5.56밀리 총탄이
쏟아질 것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나도 마찬가지고..
그 짧은 찰나에 몇 년 전에 합기도를 단봉술을 연습할 때 단봉으로 상대방의 칼을 막은 동작을
가르켜 주면서 사범과 내가 나누었던 대화가 떠 올랐다..
" 사범님, 솔직히 이 단봉으로 어떻게 상대방 칼을 막습니까?..어디를 언제 어떻게 찌를찌 모르는데
그냥 도망가는게 상책 아입니꺼? "
" 맞다..그럴 수 있다면 그러는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옛날에 절권도를 만든 이소룡이도 상대방이
칼을 들었으면 가급적 마주치지 말고 피해라고 했을 정도고..예나 지금이나 칼을 든 상대방을
맨손으로 제압하는 것은 아무리 무술고수라 해도 여간 힘든게 아니지..
하지만 네 손에는 비록 나무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직접 칼을 맨살로 막지 않아도 되는 단봉이
있다..최소한 칼 막다가 네 손이나 팔, 발이 베이고 찔리는 것만 막아도 그만큼 네가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는거지..
... 상대방의 칼든 손을 보면서 막을려고 하면 이미 늦다..그래서 너를 찌르거나 베려 하는 놈의
눈을 주시해야 한다..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야..상대방의 발동작이나 발동작이 같이
보이면서 어디로 공격해 들어올지 알게 되고..연습이 그래서 필요한기다..자..해보자.."
당사에 사범이 든 칼 흉내를 낸 나무막대기에 엄청 많이 찔리고 맞았고 멍도 들고 했지만,
부지런히 연습을 하니 검은 띠를 딸 즈음에는 무작위로 휘두르는 사범이나 다른 유단자의
단봉을 거의 다 막아냈던 기억이 났다..
그래..이 새끼하고 나하고 누가 죽느냐 사느냐는 눈을 보면서 대응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몇 십초를 둘이 꼬나보면서 버텼을까..전황은 아무래도 헬기강습부대의 지원을 받는
내가 심리적으로 우위에 있어서일까..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녀석의 눈빛이 깜빡거리면서 자기가
들고 있는 드라구노프의 총구쪽으로 쏠렸다..
' 이때다~!!! '
바로 몸을 주저 앉히면서 약간 왼쪽을 향해 있던 소총의 총구를 오른 쪽으로 돌리면서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한발로 모자라서 손가락을 계속해서 당겼다..
" 터텅~!! ".." 탕..탕..탕..탕"
- 계 속 18 -
내 욕심으로는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으나 네발 정도를 쏘았을까..오른쪽 어깨를 누군가 거대한
몽둥이로 내려치는 충격이 순간적으로 왔는데 녀석을 쏘고 나는 피할요령으로
주저 앉으면서 바위에 내찧은 엉덩이가 아픈 통증도 모를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고 내 오른쪽 뺨에 누군가 더운 물을 끼얹는 느낌도 동시에 들었다..
녀석의 아랫도리가 빤히 보이는데 상체를 보니 내가 쏜 총알이 다 맞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등뒤에서 떠오른 아침 햇살에 연한 피빛 보라가 녀석의 상체부분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독한 놈의 오른손에 걸치고 있던 헝겊을 둘레로 만 드라구노프는 녀석의 손에서 미끄러지듯이
그대로 바위틈으로 떨어지고 녀석의 상체는 완전히 뒤로 꺽이고 얼굴부위는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서히 슬로우 모션으로 불과 몇 십초전에 자신이 디뎠던 바위의 뒷쪽으로 몸이 꺽여져 가라 앉았다..
불로 지지는듯한 오른쪽 어깨의 통증에도 분명히 내가 들고 있어야 오른 손의 소총을 더 이상 쥐고
있을 힘이 없어졌고 총구에 대검을 장착한 케이투 소총이 둔탁한 플라스틱 소리와 대검이 돌에 부디치는
소리를 내면서 내가 주저 앉은 바위 오른쪽의 경사면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갑자기 정신이 몽롱하고 그냥 이대로 앉아 있을 힘조차도 없었지만 뒤로 넘어지면 목이
부러질 것 같아서 그냥 내가 타고 앉은 바위 앞쪽으로 다리를 내리밀면서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전투화가 투박하게 바위에 닿은 느낌이 들고 내 몸은 나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조금전 내 총알을
맞고 뒤로 넘어진 녀석이 서 있던 바로 그 바위의 안쪽면에 내 얼굴이 마치 찟듯이 들이박고 순간적이지만
바위돌의 꺼칠한 표면이 내 얼굴을 할퀴는 느낌을 받으며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안동을 감아 돌며 흐르는 강가의 모래는 곱기 그지없었다..
내일 입대를 앞두고 친하게 지내던 주용이와 장일이, 그리고 오랫동안은 아니지만 서글서글한 눈매가
마치 사람을 빨아들일듯이 깊은 맛을 지닌 민지..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한여름의 뙤약볕을 피해
캡틴큐 서너병과 말린 오징어, 칠성 사이다와 새우깡 같은 과자 부스래기를 들고 찾은 곳은
하회마을 북쪽을 구렁이처럼 휘감아 도는 강가의 조그만 섶다리 밑에서 한쪽에는 제법 수량이
풍부한 물이 흐르고 조그만 조약돌도 많았고..다리 밑에는 적당한 그늘이 지고 수시로 바람이
불어주는지라 입영전 오후의 느긋한 술자리를 펴고 있었다..
당장 기차를 타는 것도 아니고 아직 머리를 빡빡 밀지도 않은 상태라 분명 내일이 내 청춘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빡빡 기면서 살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병역법에 기초한 이년 삼개월의 생활..
수 많은 대한민국의 젊은 남자들이 누구나 다녀와야 하는 것이지만, 벌써 내 친구들만 해도
나보다 더 멀쩡하고 체중도 정상인 놈들이 방위나 아예 면제판정을 받는 것을 보고 내심
돈없고 빽없는 놈들만 가는 곳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고..
나 또한 외동아들로 지긋지긋한 군생활을 마친 아버님이 행여나 잘 못 될까 해서
이리저리 수소문도 하고 역이 아닌 방위라도 빼 보시려고 무던히 애를 썼건만
결정적 힘이 모자랐는지 신체검사에서도 1급을 판정을 받았고..
그것도 원채 체중이 모자라 그랫지 1급갑도 충분할 도로 완벽한 군대용 신체였으며,
마지막으로 이리 저리 수소문 해서 연줄이 닿은 사람이 육군본부에 있는 모모 대령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빠져나오는 방법을 자문 받으러 서울로 다녀 온 당일날..
나는 아버님께 당당하게 말씀 드렸다..정식으로 군대 다녀와서 사람구실 하겠다고..
서울에 갔더니 이 인간말종이 입대 바로 전날 내팔에 염산을 부으랍니다..
그러면 화상을 입을거고 입대후 신체검사에서 귀가 판정을 받으면 그 때 손을 써서
빼주겠답니다..완전면제는 아니고 보충역정도는 받을거라고..
저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물려주신 이 소중한 몸에 그런 무식한 방법을 써서 훼손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다녀 오는 이 군대..당당하게 다녀와서
열심히 공부해서 멋진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말년에 일본군에 입대했고, 해방후 다시 농사를 지으시다가
625가 터지고 국방군에 다시 입대해서 전선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가족들 생각에
무단탈영을 하셨고, 곧이어 밀고 내려온 인민군들에게 부역을 강요받았으며..
다시 국군이 밀고 들어오자..무단탈영에 인민군 부역의 죄까지 덧씌어져서
대구 교도소에서 사형집행만 기다리다가 인민군 부역당시 여러 사람들을 살린
공으로 많은 이웃들이 탄원서를 넣는 바람에 호적에 빨간줄만 그인채 그렇게
도시생활을 시작하신 분이다..
그런 아버지가 생각하는 군대는 제 아무리 TV에서 배달의 기수를 틀어도 그당시의
참혹했던 배고픔, 죽고 죽이는 현장에서 받은 트라우마 가득한 지옥같은 생활이었을
것이고 하나 있는 아들이 그런 곳에 가는 것을 못내 막아 보고 싶어셨던거다..
그래도 나의 당당한 도전에 아무런 말씀 없이 딱 한 마디 하셨다.
' 절대 나서지 마라..무조건 네 몸이 최고우선임을 잊지마라..'
독하디 독한 캡틴 큐 몇 잔을 털어넣고 오징어도 씹다 보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이왕 가는거 큰 소리는 쳤지만 걱정은 걱정이다..
장일이가 씨익 웃으면서 민지는 자기가 잘 돌볼테니 걱정말고 오십킬로도 안 나가는
내가 말년이면 뚱뚱해져서 나올테니 체력단련한다고 생각하라고 덕담을 건네고..
평소 입거칠기로 소문난 주용이도 두 달후면 자신도 똑 같은 운명을 맞는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착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연신 병뚜껑으로 캡틴 큐를 들이켰다..
대구에서 같이 동행은 못하지만 그래도 돈도 별로 없는 놈들이 십시일반으로 거두어 준
몇 만원 되는 돈으로 멋스럽게 마시자고 동네 수퍼에서 사온 것이 그나마 고급 술인
이 캡틴이다..해적선장 모자를 쓰고 애꾸눈을 한 병에 붙은 놈의 인상이 그다지 고와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것도 호사스러운 일이다..
다시 순배로 돌아온 병뚜껑 술잔을 입에 털어놓고..내 옆에서 아까부터 나무작대기로
모래만 뒤적거리면서 파 대던 민지 얼굴을 바라 보았다..
눈이 이쁘고 커서 내가 반했는데 오늘은 더 이쁘고 갸름하다..내가 병뚜껑에 다시 술을 붓고
" 민지야..한 잔 해라.."
고개를 들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애의 왕방울만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 병철아..안가면 안돼? "
내가 건네주는 술잔아닌 술잔을 건성으로 받아든 민지가 거의 울먹이는 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 오물거리면서 말을 하는 그녀의 입술이 너무나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앞에 두 녀석이 있건 말건..그 애의 얼굴을 두 손으로 와락 잡고서는 입술을 갔다 댔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누군가 내 몸을 공중으로 쑥 뽑아올리면서 너무나 또렷하게 방금
내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민지와 주용이, 장일이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강한
햇살이 껌뻑거리는 내 눈에 쏟아져 들어왔다..하지만 아직도 귓가에는 민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메아리처럼 맴돈다..
' 병철아..안가면 안돼? "..안가면 안돼?..안가면 안돼?...
눈을 뜨기가 힘들어 오른 손으로 햇살을 가리려 했지만 오른 손을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내가 기절 했었나 보다 생각하고
침침한 눈을 대충비지려고 왼손 들어 올리니..
" 야~!!..유병장..정신이 드나..!! "
누군데 내 이름을 다 아나?..난 누군지 모르겠는데..
나를 부르던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자..
다시 먼쪽을 보고 고함을 지른다..
" 어이~!!, 강상병, 조중사..!!..여기 임마 살았다..여기 와서 응급처치 좀 해라~!! "
몇 명이 둘러쌌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아까 내가 쓰러졌던 바위틈에서 끌어 올려져서
비교적 편평한 곳에 누워있었다..오른 쪽에는 얼굴에 위장을 잔뜩해서 시커먼 녀석이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고..발 아랫쪽에는 두어명이 서서 거총 상태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왼쪽에는 최소한 중사계급 이상이 분명한 입냄새가 아주 심한 군인이 있었고..
상공에는 헬리콥터가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고..소란스러웠지만 더 이상 총소리는 없었다..
누군가 내 옆에 꿇어 앉더니 뭔가 주섬 주섬 꺼내고..입냄새 심한 부사관이 무전기에 대고
고함을 지른다..
" 뭐?..이 놈을 들쳐메고 내려 오라고?..야 이 새끼야..네가 해라!!..이 험한 곳에 멀쩡한 놈도
올라오고 내려가지 좃같은데..누가 누굴 들쳐메란 말이냐..여기 이 유병장이 그래 포격
유도하고 했던 빨간 뼝아리다..그래..다음 헬기 보낼 때 의무병하고 간이침대라도 보내란 말이야!!"
뭔가 무전기 저쪽에서 지껄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면서 다시 눈 앞이 캄캄해져 왔다..
- 계 속 19 -
잠깐 잠깐 기억에 시월 강원도의 찬 바람이 얼굴을 할퀴듯이 불고 시끄러운 헬기의
타타타타 하는 소리가 들렸다가 다시 정신을 잃고..크레졸 냄새 가득하게 코 끝에
풍기면서 다시 기억이 끊기고..또 누군가 나를 이동침대에 뉘이면서 시팔대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거대한 태양이 내 눈앞에 비치는 듯한 강렬한 빛을 눈으로 맞으면서
정신줄을 아예 놓아 버렸다..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을 잤을까? 머리는 빠개지듯이 아프고 코에 뭔가 끈적하면서도
단단한 이물질이 느껴진다..오른쪽 어깨는 대 못으로 내리찍는듯한 통증이 심장 뛰는
속도와 묘한 공명현상을 이루면서 느껴진다..아프긴 했지만 고함을 지를 정도는 아니다..
눈을 꿈뻑 꿈뻑 움직이면서 고개를 좌우로 돌려 보니, 병원임은 당장 알겠지만 어딘지
알 수가 없고..양 옆에는 나 같은 중환자는 아닌지..환자복을 입은 머리짧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긴급 뉴스를
궁시렁 대면서 보고 있었다..
" 야..야..정신이 드나? "
언제 왔는지 내 왼쪽에 대위 계급장 선명한 군의관이 아주 안되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다..
" 여기가 어딥니까? " 말한마디를 내 뱉는데 머리는 안에서 자갈돌로 쎄게 긁어대듯이
쑤셔왔다..
" 여기? 원주 51병원이다..어이~!, 김병장..이리 와바라 "
군의관이 지나가는 의무병인지를 불러 세우는데..
바로 옆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환자들 세명이 같이 내 쪽으로 뭉기적 대면서 온다..
' 이 떨거지들은 뭐야?..뭐 구경났어?..시팔 머리도 아프고 어깨는 어찌된게 이렇게 아프냐..'
" 김병장, 여기 이 어디 보자..유병철 병장이구먼..이 친구한테 설명좀 해줘라..
진통제는 네 시간후에 놔주고..잘 보살펴..이친구..전쟁영웅이야.."
군의관이 사라지고 마치 경극배우처럼 얼굴이 하얗고 곱상한 병장 하나가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환자들이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 아저씨!..아저씬 오른쪽 어깨 쇄골이 완전히 부러져서 그거 붙이는 수술 받았고요..
머리가 엄청 아플건대..그건 마취가 깨면서 그런거니 조금만 있으면 괜찮을 겁니다..
매일 네 번 진통제하고 항생제 줄텐데..꼬박 꼬박 챙겨먹고..지금 링게를 새로 갈았으니
별로 내가 해줄건 없어요..똥 오줌도 당분간 안 나오겠지만 정..마렵거던 중당을 불러요.."
중당?..중환자 당번이다..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다시 감으니 오른쪽 옆에 서 있던
환자중의 한 명이
" 와..당신 대단한 일을 했어!..계급은 내가 한참 위지만 존경스러워..당신 때문에 그 날고
긴다는 정찰여단 애들 완전 박살이 났어..지금 저 뉴스에서도 난리도 아냐.."
" 맞다..확실히 그래도 훈련 빡시게 받은 애들이 뭔가 달라도 다르네.."
" 어째 그 놈들 뒤를 따라가서 포격으로 박살낼 생각을 다했데? "
뭐라 뭐라 어지러이 지껄여대는 분답한 소리를 들었지만 대꾸를 하고 싶은 마음도..그럴 힘도
없었다..그저 이 머리 아픈 거 하고 어깨쭉지 통증만 어떻게 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갑작스러운 호들갑에 잠이 깼다..
" 추웅써엉~!! 대위 이광철~!! "
목소리가 보니 아까 나를 대충 보고 가던 군의관이다..저 군기빠진 대위가 저리 절도있게 쩌렁 쩌렁
관등성명 대는 거 보니 별이라도 떴나?..뭐 그렇다고 해도 만사가 다 귀찮은 내가 몸을 일으킬 필요도
없겠지..그냥 게기자..잠이 달아난 것이 좀 억울했지만 아까의 두통은 많이 좋아졌고..중간에 내가
자는동안 강력한 진통제를 놨는지 어깨의 통증도 견딜만 했다..
몇 사람이 저벅거리른 소리를 내더니 곧장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온다..
' 뭐야?..내가 뭐 대단한 놈이라고 내 쪽으로 오노?..그냥 눈 감고 있자..'
그런데 생각과는 다르게 눈은 감기질 않았고..중당인지..의무병인지 내 침대 아랫쪽에 있는 레버를
몇 번 꿀덕꿀덕 돌리니 내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침대의 상체부분이 일으켜 세워진다..
약간 오른쪽 앞에 보니 맙소사..눈이 부실정도의 별들이 앞에 도열해 있다..
맨앞의 장군은 무려 별이 세개요..주변에 널어선 계급들은 별 하나..대령..중령..뭐 장군들과 영관급들이
쭈욱 서 있다..맨 왼편에 선 군의관이 절도 있는 목소리로 보고를 한다..
" 217번 환자..XXX 특공연대 1대대 소속 병장 유병철..어깨 관통으로 인한 쇄골 파손으로 접합수술후
치료중입니다..예상 입원기간은 약 3개월이며..재활훈련 포함 약 12개월 소요예정입니다.."
" 음..그래..수고 많았어..이 친구 각별하게 돌봐 주도록..군단전체의 모범사병이요..이번 전투의 최고
영웅이다..혹여 소흘함이 없도록..그리고 병실도 이 곳 말고 특별실로 옮기도록.. 최소한 영관급 대우를
해주란 말이야.."
" 옛..잘 알겠습니다.."
나는 왼손으로 거수경례를 해야 할지..몸을 일으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지..어안도 벙벙하고 도대체
뭘 해야 할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명확하게 개인들의 표정을 다 볼 수는 없었지만, 군단장의 말에 주변의 고급장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군단장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최대한 군기든 표정을 하고 입을 열려고 하니 군단장이 제지를 시킨다..
" 괜찮다..푹 쉬어라..너희 대대장이 왔으니 자세한 설명은 따로 듣도록 하고..수고 많았네.."
그리고는 별 세개가 나에게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붙이고는 뒤돌아 가 버렸다..
한무리의 영관급 장교들이 군단장을 따라가고 맨 뒷 쪽에 있던 분명히 우리 대대장이 맞는
박일춘 중령이 내게 다가왔다..그리고 그 옆에 작전참모와 대대 주임원사가 같이 따라왔다..
" 유병장,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자네 덕분에 이번에 상봉지역으로 침투한 적 병력 전부를
다 잡았다..대충 세어봐도 이백명이 훨씬 넘어..아직 잔당이 있는지 2대대,3대대, 12사와
27사 수색애들이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 정리되는 건 시간문제다..자네는 일계급 특진에
제대후에도 계속 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대대장이 자기가 다 설명하기가 좀 머쓱했는지 눈길을 대대 주임원사에게 돌렸다..눈치 빠른
대대주임원사 강민수 원사가 설명을 이어갔다..
" 아쉽게도 우리 1대대 지역대의 대부분에서 사상자가 났다..유병장이 소속된 지역대는
유감스럽지만 유병장이 유일한 생존자다..김중사도 비트 참호에서 죽었고..우리 1대대는
재편성이 필요할 정도로 타격을 많이 입었지만 그래도 저 새끼들 다 잡았으니 할 일은
다한 셈이다..내일 군단에서 작전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몇 명이 올거야..그러면 있는
사실 그대로 다 설명해주길 바란다..최대한 기억나는대로 살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잘 알겠지? "
말로 대답하는 것 보다는 그냥 군기빠진 병장처럼 고개만 끄덕였다..뭐 그런다고 귀싸대기를
칠 것도 아니기에..
" 편하게 마음먹고 푹 쉬게..대대장님 가시죠.."
그들은 왔을 때처럼 무덤덤하게 다시 광장같이 넓다란 이 단체 병실을 빠져 나갔다..
다시 눈을 감았다..
- 계 속 20 -
< 에필로그 >
원주 통합병원에서의 생활은 이따금 쑤셔오는 어깨의 통증만 빼고 나면 그렇게 꿈꾸던
말년병장의 느긋함을 만끽하는 것이었다..
방귀가 나오고 여느 곳이나 다름없는 똥국에 양배추김치, 쉰내 물씬 나는 찐밥에
그래도 환자라고 우유 한 곽이 매끼니마다 나오고 10월말로 접어든 원주의 날씨는
아침과 저녁에는 제법 쌀쌀해서 담배라도 한 대 필려고 병동 바깥으로 나갈 땐
야상잠바라도 걸쳐야 했다..
군단장이 다녀가고 사흘인가를 별관에 있는 특실로 옮겼으나 너무나 적막하고
식사도 별다르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서 군의관에게 대들다시피 떼를 써서 다시
이 곳 일반 병동으로 돌아왔다..
군단, 육군본부, 군사령부등에서 작전 및 전투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몇 몇 팀이
다녀갔고 나는 사실 그대로 기억나는 그대로를 설명했다..그들은 별다른 토를
달지는 않았지만 한결같이 내가 최고의 전투병사로 선입관을 가지고 왔다가
노충열 하사의 뛰어난 판단력과 상황조치야말로 이번 작전의 최대 분수령이었고
결정적 순간들의 연속이었음을 알고 갔다..아마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고
일계급 특진은 따놓은 당상이었지만 정작 노하사 가족들이 받는 보상금은 미미하기
그지 없어서 안타까웠다. 월 백만원 조금 넘는 보상금으로 상주에 있는 노하사 부모님들의
생활이 유지될까 걱정스럽기도 했고 젊은 목숨 하나 값이 그것밖에 안되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그나마 유공자 가족으로 등록되어 각종 세금혜택이나 동생들의 취직에 플러스 인자가
붙는다는 것이 위안거리가 될까..
소식을 듣고 달려 오신 부모님..
어머님은 며칠 째 잠 한 숨 못 주무셨는지 쾡한 얼굴로 그래도 아들이 이만하길 어디냐..
다른 곳은 다친데가 없느냐 이리저리 더듬어도 보셨지만, 아버님은 물끄러미 내 얼굴과
어깨를 둘러싼 붕대를 보시더니
" 욕봤다..그래도 다행이다.." 하시고는 별 말씀없이 면회실 안이 자욱하도록 담배만 태우셨다..
가지고 온 음식은 병동의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난뒤..또다시 의미없는 몇 일이 지나갔다..
우리대대는 다른 대대에서 지원병력 받아서 재편성하고 보충병력 받고 하느라 바쁜지 중간에
지역대장과 박만길 원사가 지급품 몇가지를 A 급으로 가지고 왔고, 어느덧 제대날짜는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이 왔다가고 해도 내 마음 속에 허전함..
지역대 동료들이 거의 전멸하였으니 내가 제대할 때 진심으로 축하해 줄 사람들도 없었고,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꾸민 전역식에서 내가 큰 감동이나 흥이 날리는 없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노충열 하사의 그 뛰어난 판단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진식 중사가 후방 매복조가 기습을 당했을 때 뛰어가서 그 새끼들이 우리 뒤를 치는
시간을 지연시키지 않았으면..나는 이 자리에 단연코 없다..그 작전이 끝나고 이제 열흘째,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내가 마지막에 쏘아 죽인 적이 조금만 조금만 더 빨랐다면
내 몸이 7.62mm 총탄을 맞고 터져 나갔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가?...수 많은 동료들과 비록 적이지만 수도 없이 상봉지역에 피를 뿌리고
죽어간 댓가로 나는 하사 계급장과 충무무공훈장을 달고 이렇게 살아 있는가?
육개월째 소식이 없는 민지는 내 마음에 살아 있는가?
이 곳 남한 땅에 내려와 헛된 목숨을 날린 적들의 가족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까?
평소 눈에 빠삭한 지역에서 뭐가 뭔지도 모른채 숨져간 내 동료들은 저 피안의 세계에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며, 그 가족들의 슬픔은 어떻게 우리 생존자들 마음에
살아 움직이게 될까?
부쩍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담배를 흡..흡..빨아들이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울을 보니 마치 악몽에 시달린듯이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기고 언듯 봐도 피부색이 새까맣게
변해 가고 있다..
담배를 세가치 연거푸 피우고 난 뒤..화장실에서 찬 물로 입을 헹구고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서
병실로 들어서는데 오십 명이 넘는 환자들이 전부다 TV 앞에서 넋을 빼놓고 막 흘러 나오는
긴급뉴스를 듣고 있다..
뭔가 싶어서 나도 화면은 보이지 않지만 뉴스 앵커의 날카롭고 긴박함 가득한 목소리를 듣는데
" 현재 군당국은 백두대간 일대에 침투한 적의 규모와 침투지역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특전사, 정보사령부 요원들을 급파하여 발생한 피해지역을 조사하고 있습니다..자세한 소식은
국방부에 나가 있는 오세환 기자가 전하겠습니다..오세환 기자!"
" 예, 오세환입니다..지금 저는 국방부 브리핑 실에 나와 있습니다..조금 전 국방부 관계자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는 대규모 적 침투부대가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문경새재,
덕유산 지역에서 동시에 가을 산행을 즐기고 있던 등산객들을 무차별 살상하고, 강원도 남쪽
울진 응봉산에서는 단체로 온천여행을 온 여행객들을 무차별 사살하고..지금 출동한 아군과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국방부는 전지역의 시민들에게 가급적 산악지역으로의 여행이나, 이동을 삼가하고 지속적으로
라디오나 언론매체를 통해 발표될 군당국의 지시와 협조에 적극적으로 따라 줄 것을.."
성동격서..우리가 문 것은 적의 미끼였다..!!!
우리들의 이목과 관심을 붙잡아 두기 위해 그렇게 상봉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켜 농성을
벌이고..그 사이 이미 침투해 있거나 후속 침투부대가 급속행군으로 백두대간을 타고 밑으로 밑으로
치고 내려간 것이다..
- 끝 -
< 다음 소설은 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간 적들과 마주친 한 등산객의 처절한 생존기를 주제로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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