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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설/SF·신비·구도

[스크랩] "서 시베리아도,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

서시베리아도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이진아 환경 & 생명 저술가 / 2017.05.20 (토) 



기사 원문,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68994






박창범 교수가 제시했던, 고대 동아시아 지도를 다시 한 번 더 보자.




 

 

ⓒ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속 발췌

ⓒ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속 발췌






고구려의 경우는, 동심원의 중심이 두 개다.

즉, 
천문 관측소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정치 중심지가,
두 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우선 더 먼 쪽인 우랄 산맥 동쪽, 서(西)시베리아 평원은,
우리 민족의 땅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비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멀다.

하지만, 이 지역과 한반도의 연결은 비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언어는 알타이어 계(系)로 분류될 정도로,
우랄 산맥 동쪽에서 알타이 산맥 북쪽에 이르는 지역의 원주민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최근에는,
이 지역 중심지인 카자흐스탄과 우리 민족,
특히, 고구려의 문화 유산에서 공통점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
우리 민족이,
텐산 산맥에서 바이칼호 유역에 이르는 비옥한 땅을 출발점으로 북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서(西) 시베리아를 비롯, 북아시아 동쪽 일원에 확산되었던,
인간 집단의 후손일 가능성은 결코 적지 않다.

전(前) 삼국 시대는, 기후가 온난한 시기였으므로,
이렇게 위도가 높은 곳도 상당히 살만했을 것이다.




 

ⓒ 이진아 제공

ⓒ 이진아 제공






그곳에서, 만주 평야에 이르는 노정은,

시베리아 동부의 아마르자르 산맥(9Amarzar Range),

만주 서북부의 킹간 산맥(Khingan Range) 등이 연이어 있는 높은 산지여서,

얼핏 보기엔 사람의 이동이 쉽지 않았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경사가 서에서 동으로 기울기 때문에,

거의 3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헤이룽 강(아무르 강)이,

그 산지들 사이를 흐른다. 


따라서, 기후가 온난할 때라면,
배를 타고 이 정도 거리를 커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설령 기후가 추운 때라도,
맘만 먹으면,
말이나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꽁꽁 얼어붙은 강을 따라, 쾌속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헤이룽 강의 큰 지류로,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쑹화 강 일대는 비옥한 땅이어서,
지금의 카자흐스탄이 있는 곳에서 출발해서 물길을 따라 이동한 인구 집단이,
여기서 제 2의 국가를 충분히 세웠을 만하다. 

이렇게 지형과 기후 변화 조건을 고려해본다면,
박창범 교수의 지도가 보여주는 대로,
서(西) 시베리아 평원에서 북 만주 고원 지대를 지나 만주 평야를 품고,
세력이 클 때는 한강 이북까지도, 하나의 인간 집단이 장악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즉,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집단이다.

그들이 더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했던 것은,
이미 한반도 서쪽과 남쪽 해안에서 자리잡고 있었던 원주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백제 · 가야 · 신라다.

상대 신라의 정치 중심지가, 양쯔강 중류 지역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지도를 보자.


여기서 고려할 것은,

통일 전 신라의 문화 유산에 대한 기록은,

상당 부분 가야의 것과 섞여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정확히 이 부분에 대해서 단언할 근거는, 물론 찾기 힘들다.


하지만,

세계 다른 지역의 경우를 보면,

정복자가 피 정복지의 유산 중의 쓸 만한 것은,

자기 것처럼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특히, 천문학적 지식 및 기술은,

바다를 항해하는 종족들에게서 크게 발달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어두워지면, 별빛을 보면서 뱃길을 찾는,

요즘 사람들이 ‘스타 내비게이션’이라고 부르는 항법(航法)을 썼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분야에 대한 가야인의 노하우 수준은,

동아시아 일대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최 정상급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국가로서, 가야가 망한 이후에도,
신라의 통치자들을 위해 이 분야에서 일했던 사람 중에,
가야인의 후손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이전에 들었던 얘기를 기록에 남기기도 했을 것이다.

혹은,
가야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으며,
사람 이름만 바꿔서, 신라의 얘기인 것처럼 남길 수도 있다. 

<(일본의 동양 고대사 전문가로 높은 평판이 있는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静) 박사는,
《文化における歴史》(문화에 있어서의 역사, 2006)라는 책에서,
이와 유사한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서기 3 ~ 4세기 경, 백제 도래인이 일본에 한문을 전달한 이래,
한동안 문자 기록은, 백제 도래인 출신 및 그 후손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의 고대사 기록은,
이들의 기억 및 관점 위주로 돼 있어서, 사실과 편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상대 신라의 천문 관련 기록은,
가야의 천문 관련 기록과 적어도 상당 부분 겹칠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상대 신라도,
적어도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것보다는, 훨씬 더 큰 나라였을 것이다.

역시, 중국의 영향 하에 역사 왜곡이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남 해안을 중심으로 해양 활동도 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가야 전성기엔,
가야의 해상 활동 규모가 훨씬 컸을 것이며,
그런 활동의 흔적이, 나중에 신라 역사로서 흡수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는,
대륙을 통일한 한(漢) 나라가,
서기 9년 외척 왕망에게 망한 이후 거의 500 ~ 600년 동안,
신 · 후한 · 삼국 시대 · 위진 남북조 · 오호십육국 등으로 무수히 많은 나라들로 갈라져 싸우면서,
새 왕조가 들어섰다가 금방 망가져 사라졌다 하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기록에 남은 이 기간의 역사는,
주로 양쯔강보다 더 북쪽인 황하 유역을 무대로 하는 것이다.

양쯔강 일대의 역사에 대해서 정사로서 기록된 것은,
삼국 시대 오(吳) 나라 정도다.

그 오나라의 경우조차, ​ 
《​삼국지》​속에서 유명한 손권(孫權)을 제외하면,
왕족 손 씨의 통치 기간도 짧았고, 통치력도 별로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가야가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기 1세기부터 6세기까지,
중국의 대표적 지배 계급 한족(漢族)은,
그 비옥한 노른자 땅 양쯔강 유역에 발을 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어,
북쪽의 선비족 출신 수 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고는 하나,
그 범위는, 황하 유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 다음 들어선 당나라 때가 되어서,
그것도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양쯔강 유역까지 통치권 범위 내로 확보하게 된다.

수 나라와 당 나라는, 자기들이 한족임을 표방했다.

그러니까,
한 나라(전한) 멸망 이후, 한족이 다시 양쯔강을 완전히 장악하기까지는,
6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 사이, 이 광활한 옥토의 주인은 대체 누구였을까?

뛰어난 항해술과 친화력으로
물길을 따라 세계를 누볐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 개연성을 시사하는 증거는 많다.

하나만 예를 들면,
일본어에서는,
‘가야(伽倻)’란 단어도, ‘당(唐)’이란 단어도, 때로는 ‘중국(中國)’이라는 단어도,
훈으로 읽을 때는, 모두 ‘가라’カラ라고 읽는다.

아마 그들이 ‘가라’라고 불렀던 지역,
즉 중국 동남부가 원래 가야였다가,
나중에 당 나라를 비롯한 중국의 차지가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지역에서, 새로 지배 계급이 된 한족들이,
이 지역의 이전 지배 계급이 한민족(韓民族)인 가야인이었다는 사실을,
역사 기록에 남겨두었을 리가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출처 : 그날이 오면.....
글쓴이 : 이소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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