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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요]여고 졸업반 - 김인순

여고 졸업반 - 김인순







여고 졸업반 - 김인순


이 세상 모두 우리거라면
이 세상 모두 사랑이라면
날아 가고파 뛰어 들고파
하지만 우리는 여고졸업반
아무도 몰라 누구도 몰라
우리들의 숨은 이야기
뒤돌아 보면 그리운 시절
생각해 보면 아쉬운 시간
돌아 가고파 사랑 하고파
아 잊지못할 여고 졸업반
아무도 몰라 누구도 몰라
우리들의 숨은 이야기
뒤돌아보면 그리운 시절
생각해보면 아쉬운 시간
돌아 가고파 사랑 하고파
아 잊지못할 여고 졸업반
아 잊지못할 여고 졸업반






 

 

70년대 중반 포크 가수, 방송 DJ로

남자 중 고등학생들의 우상으로까지

군림했던 만년 소녀가수 김인순.

 

35세의 한창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세월이 정지한 듯 밝고 푸르른 여고생 이미지의 흔적은 지워지질 않는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다정다감하고 깨끗했던 그녀의 노래들은

낭만이 듬뿍 배어나는

옛 추억의 가슴떨림을 느끼게하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불멸의 히트곡 <여고졸업반>등

 소녀적 감성의 노래들은 졸업 시즌이 되면

지금도 어김없이 부활하여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1953년 서울 중구 태평로에서

은행 간부였던 부친 김오봉과 모친 홍성길의 3남2녀중 막내로 태어난 김인순.

 

윤택한 집안의 늦둥이는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아쉬움이란 없었다.


 

쾌할하고 사교적이었던 성격뿐 아니라

피아노, 노래, 고전무용, 발레, 운동 등 예 체능에도 뛰어난 재능은

 항상 주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했다.

 

남산초등학교 2학년 때는

 어린이 성우로 KBS 방송 출연을 하더니

4학년 때는 서울시립합창단 창단 멤버로 활약했다.


병약했던 부친은 늦둥이의 재주가 유일한 낙이자 자랑이었다.

김인순은 공부와 운동, 노래로

우등상과 예 체능 관련상을 부지기수로 타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던 효녀였다.


또한 상으로 타온 노트, 전과, 사전을

불우한 친구에게 나누어 준 선행으로 주변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은 ‘악순이’ ‘64방미인’.

늑막염을 앓을 만큼 열심히 공부한 김인순은

명문 이화여중에 입학,

세상을 등진 부친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중학시절의 별명은

몸이 너무도 말라 골골하다하여 말라깽이였지만

본격적인 성악 공부로

음악콩쿠르에서 입상을 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이화여고에 입학해서는 200대1의 경쟁을 뚫고

교내방송 아나운서가 되는가 하면 합창대회때는 지휘자로

배구시합 때는 센터로 나서며 타고난 재주를 뽐냈다.


대중음악에 빠진 것은

기타를 치는 막내 오빠의 멋진 모습 때문이었다.


오빠를 따라 기타를 배웠다.

 비범한 음악 재능과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김인순은 일취월장,

곧 오빠를 능가했고

 

고2 때까지 학내에서 7번의 개인 리사이틀을 가질 만큼

소문난 노래꾼으로 명성을 날렸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수험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녀에게

매일같이 교문앞에서 기다리는 30대 남성이 있었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폭발적 인기프로였던

<세븐 틴>의 PD 김진성이었다.


한번만 출연을 해달라’는간청에 못이겨

방송에 나가 노래를 불렀는데 문제가 생겼다.


놀라운 팬들의 반응을 접한 김인순은

시험 공부보다는 노래에 빠져들게 된 것이었다.


그 결과는 연세대 신방과 낙방이었다.


처음 맛보는 쓰라린 좌절도 잠깐,

타고난 낙천적 성격은 곧 쾌활함을 되찾고

이번에는 성우가 되기 위해 방송국으로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이 때 만난 이장희는 그녀를 <0시의 다이얼>게스트로 초청하여

포크 싱어로 첫 발을 딛게 만들었다.


 

이 때가 73년 5월.

데뷔부터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탄탄대로를 질주하며

KBS 라디오 <젊은이의 광장>, 74년엔 동양 라디오 <팝송 다이얼>의 소녀 DJ로

청순한 이미지를 굳히며 성장했다.

 

데뷔곡은 청소년층에 인기가 높았던 <언니의 일기-아시아,ALS354,75년5월>.

DJ뿐만 아니라 가수로도 발판을 닦게 했다.


75년 12월 두번째 앨범 <여고 졸업반>은 공전의 빅 히트로

가요순위 프로 1위에 등극하며

단숨에 톱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친구사이> <선생님 안녕히> <푸른 교실> <소녀의 기도>등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하며

청소년층의 사랑을 듬뿍 받는 인기 가수로 자리를 굳혔다.


또한 이정선의 <비오는 날에는>,

오세은의 <새와 고기와 나>,

방의경의 <하양 나비>같은 비상업적 작곡가들의

신선한 곡들을 취입하며 음악적 영역을 넓혔다.


주요 레퍼토리로 삼았던 티없이 맑은 내용의

학창시절에 대한 노랫말은

만년 소녀가수의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강하게 각인되었다.


78년 9월 김인순은 천호동의 한 교회에서

 MBC 아나운서 박유명과 결혼을 하더니 8개월 후,

이전과는 다른 풍의 <긴 밤에> <용서하는 마음>등

사랑을 주제로 한 신곡을 내며 만년소녀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맑은 소녀의 이미지에 매료되어있던 팬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낙심한 김인순은 가수활동을 접고

 평범한 주부로 가정 생활에 전념,

팬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2년후 81년,

가수의 꿈을 접기가 힘들었던 김인순은

의욕적인 활동을 재개했지만 예전같은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77년 2월 어느 신문에 나온 김인순의 <사주>는 소름을 끼치게 한다.

“음력 2월에는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격.

사람 조심하고 특히 교통사고에 요주의...


” 11년 후 그녀는 인천 가좌동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인천시내 모 업소 출연후

승용차를 타고 경인고속도로를 통해 귀가하던 중

과속으로 달리던 7.5톤 트럭이 그녀의 승용차를 들이 받은 것이다.


늘 여고생같은 푸르름과 더불어 재주가 비범했던 만능 탤런트 가수 김인순.

 

허망하게 세상을 등진 비운의 가수이지만

그녀가 남긴 아름다운 멜로디들은

70년대를 기억하는 팬들의 마음속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출처 : 쉘브르
글쓴이 : 이제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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