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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

https://www.youtube.com/watch?v=IFL2zFpSFe8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즐거움과 기쁨, 환희의 순간과

반대로 겪어야 하는 슬픔, 고통, 애환, 갈등, 침잠은 늘 섞이고

예측하지 못하는 시기에 갑자기 들이닥치기 마련이다.

 

세상이 힘들어진다는 것은 아마도 후자에 해당하는

인간을 힘들게 하는 비중이 무겁거나 절대적인 무게가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겠지만,

 

정작 대다수의 경우 실제 겪어보면

또 그렇게 못 이겨낼 정도로까지 치닫지는 않는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심리학 관점에서 자주 쓰는 Heuristics(휴리스틱, 어림셈) 이론에서는

사람들이 대충 어림잡아서 정교하고 과학적이고 통계적이지 못한

사고로 인해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주사위 놀이에서

 

다른 사람이 계속 낮은 숫자의 짝만 굴려댄다면 왠지

나는 큰 숫자의 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만 같고,

 

그 사람의 성향을 보고 직업을 추론한다든지,

 

미래에 닥칠 고통을 과소평가하기도 하고 과대평가하기도 하고,

 

현재 상태에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 객관적인 기준으로 충분함에도 그 과정

(예를 들어 100억 원을 가지고 시작해서 투자실패로 50억을 가지고 있는 것과

10억에서 시작해서 성공을 거듭한 끝에 50억을 보유하고 있는 것의 차이)에 따라

각각의 행복의 지수가 달라지는 것,

 

카지노에서 룰렛을 하는데 열 번 연속해서 짝수가 나왔으니

이제 홀수가 나올 차례라고 감당하기 힘든 베팅을 한다든지,

 

실제 자주 접하는 3할을 치는 타자가 앞 세 번의 타석에서

범타로 물러났으니 이제 칠 때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험난한 고생 끝에 성공한 사람을 보고

나도 무조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 근거 없는 자신감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어림셈의 경우는 많고도 많다.

 

작년에 청허는 주변 지인들 중, 많은 사람을 잃었다.

 

가까운 친척도 있고 친구도 있으며

험난한 군 생활을 함께했던 옛 전우도 있었고

호주에서 친형제처럼 지냈던 호주인 친구도 있고

 

또 혈육도 거의 잃을 뻔했다.

 

차라리 내가 아팠다면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있다면 하는 생각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들 정도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에

무력감과 더불어 자괴감도 들었었다.

 

어제도 호주의 오랜 친구가 또 다른 호주인 친구의 죽음을 전해왔다.

 

호주에서 생활할 때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던 동료이기도 하고

인간적으로도 참으로 선했던 사람이었기에 잠시

명복을 비는 사색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우리는 늘 죽음과 탄생을 들여다보고 체험하면서 살고 있다.

 

쟝폴샤르트르가 언급했던 인생은 탄생과 선택

그리고 죽음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차라리 점잖은 표현이다.

 

치열하게 매 순간을 쪼개가면서 잠시 숨돌릴 틈 없이

매 순간을 살아내야 하는 보통사람으로서 느끼는

삶의 무게는 경중을 떠나

 

60을 훌쩍 넘어선 청허에게도 예외는 아니라서

나쁜 짓 하지 않고 반듯하게 정도를 지키면서

열심히 사는데도 왜 이렇게 허덕이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에 대해 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한다.

 

개미처럼 알뜰살뜰 모아도 가족의 병원 신세

한 번에 한 달 수입이 날아가 버리게 되면

허탈하기도 하고 애면글면하는

이 삶이 주는 무게가 다시금 무겁고도 무겁다.

 

또한 더욱 청허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지금 내가 숟가락 놓으면

나야 원래 왔던 곳으로 기억을 통째로 삭제하고 돌아가는 것이지만

남겨진 아내와 90 중반이 넘으신 어머님,

 

그리고 아직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어렵게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건강하게 버텨주고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조금만 더 살아준다면

내 돌아가는 그 날에 내 어깨의 무게가 조금은

더 지금보다 가벼워지지 않을까?

 

청허는 끝자리가 4가 들어오는 해에는 거의 매번 큰 고비를 겪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74년에는

서변동 근처 강에서 물에 빠져서 익사할 뻔했었고

(다행히도 지나가던 고등학생 형들 둘이서 구해주었다),

 

84년에는 군대에서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번지는 바람에

원주 51 병원에서 아랫배 두 군데에 긴급수술을 받았고

 

94년에는 호주 오지에서 백호주의 호주인들에게

거의 죽을뻔한 봉변도 당했었으며(지나가던 경찰 아니었다면)

 

2004년에는 음주운전으로 몰던 차가 폐차할 정도로 큰 부상을,

 

14년에는 염증이 워낙 심해서 무릎 수술에

하도 생활고가 심해서 극단적인 생각까지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다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년이 또 다가온다.

 

숨겨진 곳의 염증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겠으나

 

명리학자인 스스로 봐서도 내년은 무조건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이 최고란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이 주의한다고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가능한 마음을 가벼이 가지고 대응하고자 한다.

 

그래도 인생이라는 것이 무조건 나쁜 면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은 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만 그것이 나와 직결되는 것이냐에 따라

느껴지는 무게는 사뭇 다를 것이다.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가장 명예로운 것이고,

가수는 무대에서 학자는 연구실에서

교수는 교단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신이 누리는 삶의 핵심적 가치를

가장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명예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청허는 늘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려고 한다.

 

내일 당장 죽을지

또 하루를 무사하게 살아낼지는

어차피 하늘이 정해준 것이요,

 

절대 피할 수 없는 시기의 문제일 뿐

영생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종교적인 신앙의 개념이 아님)

 

언제 죽더라도 떳떳하게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가진 능력을 쏟아붓는 삶,

그것이 참으로 떳떳한 삶이 아니겠는가?

 

물론 질병이 닥치면 그 질병을 이겨내기 위해 가진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초월한 개념에서 단순한

생명 연장의 수단이라면 청허는 절대로 고사하고 싶다.

 

눈 감는 그 순간에 청허는 무엇을 가장 기억하게 될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에 가장 찬란하게 빛나면서

청허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때 제일 먼저 회억할 내용을 지금이라도 열심히 만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