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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나라 道(仙)家의 이모저모

우리나라 道(仙)家의 이모저모  

 


우리나라 道(仙)家의 이모저모

 

이글의 자료는 조선 선조 때 도가인 조여적(趙汝籍)이 그의 스승 편운자의 사적을 필두로 당시에 얻어 들은 기문이설을 적은 청학집(靑鶴集)을 근거로 재구성한 것이다.

역서적 고증은 미흡할지 모르나 우리나라 신선사상의 도맥을 소상하개 적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 나오는 주요인물들은 가상이 아닌 실제인물이며 역사적 고증이 가능하다.

 

 

1. 우리나라의 선맥


⑴ 운학(雲鶴) 선생(片雲子)


조선 명종14년(1559) 기미 7월 초8일 신시에 강원도 인제군 현고촌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어머니 신평이씨(新平李氏)를 따라 신계리(新溪里)로 이사하여 율탄(栗灘)의 동(東)선생에게 글을 배웠고 나이 겨우 16세에 문득 운림의 높은 뜻을 가졌었다.

또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롯이 뜻을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에 두었다.


선조 8년(1575) 을해 여름에 집 앞에 있는 괴목정(槐木亭)에 올라가서 주역을 읽고 있었는데 우바새(優婆塞) 한 사람이 옆에서 가만히 글을 읽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 말하기를 “내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많이 겪어 보았으나 그대 같은 이를 보지 못하였다. 도에 깊은 인연이 있구나”하고 소매 속에서 한권의 책을 끄집어 내어 주면서 “이 책을 가지고 산중에 들어 가면 높고 참다운 스승이나 벗, 또는 훌륭한 선생을 만나서 증(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그의 거주하는 곳과 성명을 물어 보았지만 말없이 가 버렸다. 그 뒤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되면 그의 행적을 물어 보았는데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말하기를 동해 가운데 있는 소연(소然)의 자손인 문재(文載)라고 하였다. 그 뒤 담정산(澹定山) 중에 들어가서 살았다.

 

선조15년(1582) 임오에 약을 팔려고 금장강(錦嶂江) 가에 갔었다. 그 곳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머리에 폐양자(敝陽子)를 쓰고 손에는 정공장(丁公杖)을 집고 있었다. 한번 보고 나서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거리낌 없이 토하면서 한참동안 이야기 하다가 뒷날 오대산 기린대(猉隣臺)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떠나갔다.

 

과연 그 기일이 되어 약속 장소로 가보니 일곱분의 신선들이 나란히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인사를 올리면서 절을 하자 일곱 사람이 웃으면서 소매를 잡고 바위로 올라가서 각각 그들의 도호(道號)를 말하였다. 그러나 성명은 말하지 아니 했다. 맨 앞에 있든 사람은 금선자(金蟬子)라고 했는데 금장강 가에서 만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다음이 채하자(彩霞子)이고 다음이 취굴자(翠窟子)이며 그 다음이 아예자(鵝蘂子)요 다음이 계엽자(桂葉子)며 다음이 화오자(花嗚子)이고 다음이 벽락자(碧落子)였다. 이 일곱 사람은 모두 세상에서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지혜가 천(天)과 인(人)의 이치를 통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서 자취를 강호에 숨기고 천하를 거침없이 노닐어서 중국이나 외국에 막힘 없이 돌아 다녔다고 한다.


모두 함께 청학상인(靑鶴上人)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청학상인은 우리나라 함경도 갑산(甲山) 사람이다.

성은 위(魏)씨요 이름은 한조(漢祚)며 자는 중염(仲炎)이다.

어려서 백우자(百愚子)를 따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방법을 배웠고, 커서는 화객(華客)과 양운객(楊雲客)을 만나서 함께 이술(異術)을 배운 뒤에 여러나라를 두루 돌아 다녔다. 산림에서 도가 높은 분으로 늦게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청학동에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청학상인이라고 불렀다.


이라하여 일곱 사람이 나를 인도하여 청학동으로 위선생을 찾아가서 위선생을 사사하게 되었다.

위선생은 선생에게 편운자(片雲子)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조여적(趙汝籍)이 무자년 (선조22년)에 낙방거자가 되어 뜻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 오는 길에 저탄(楮灘)에서 편운자를 만났다. 처음이라 누구인지 서로알지 못했는데 선생이 문득 나를 부르면서 “관서에 사는 조여적은 무엇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가”하므로 내 깜짝 놀라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책을 지고 눈 속을 헤매면서 선생을 따라 다닌지 이미 60년이 지났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다만 고인의 종적이 영원히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서 그동안 듣고 보고한 약간의 사적을 모아 기록한다.


청학상인의 말에 의하면 “호남의 금선자는 한라산의 영기로 태어났고 관서의 취굴자는 압록강의 영기이며 연인(燕人)인 채하자는 양화(陽和)의 후신이고 초인(楚人)인 화오자는 조빈(曹彬)의 환생이며 요동(遼東)의 아예자는 우림(羽林)의 성정이고 여진(女眞)의 계엽자는 하괴(河魁)의 정기이다. 다만 저 태원(太原)의 벽락자는 새상(塞上)에 있는 맹호의 정영이며 해서의 편운자는 운중(雲中) 백학의 혼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귀한 이를 숭상하고 천한 이를 누르는 습성이 너무 심하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선한이를 포상하는 일까지도 이름 있는 집안이나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산림에 숨어서 살면서 이름을 숨기는 사람은 대개가 뜻이 높은 선비들이다.

 

 

⑵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같은 분은 방명이 세상에 알려지고 명예가 온 나라에 진동했으며, 또한 박순(朴淳)과 허엽(許曄)과 오윤겸(吳允謙)이 그 빛을 더욱 빛내고 그것을 더욱 윤색(潤色)하였던 것이다.

 

서경덕의 시를 보면,

將身無愧立中天   몸 가지고 중천에 서기 부끄럽지 않아
興入淸和境界邊   흥은 맑고 온화한 경계가로 들어간다.
不是吾心薄卿相   이러한 내 마음이 경상에 박한 것은 아니지만
從來素志在林泉   본래부터 본 뜻은 임천에 있었다오
誠明事業恢遊刀   정성으로 밝힌 사업 넓게 칼날 휘두르고
玄妙機關少着鞭   현묘한 기관에는 채찍을 드물게 부쳤네.
立敬功成方對越   공경으로 공을 이루고 나면 상제도 대할 수 있고
滿窓風月自悠然   창에 가득한 바람과 달 절로 유연하네

 

용문(龍問) 조욱(趙昱)이 이 시에 화답하기를,

 

至人心迹本同天   지인의 마음에 자취 본시 하늘과 같은데
小知區區滯一邊   아는 이 적어 구구하게 일변에 걸렸다네
謾說轅裳爲桎梏   부질없이 원상을 말하지만 질곡이 되고
誰知城市卽林泉   누가 성시가 곧 임천임을 알랴!
舟逢急水難回棹   배란 급한 물을 만나면 돌리기 어렵고
馬在長程合受鞭   말이 긴 길 위에서는 채찍 맞기 알맞네
誠敬本非容易物   성경이란 본시 용이한 물건 아닌데
誦君佳句問其然   그대의 아름다운 글귀 외우면서 그 까닭 묻네.

 

라고 하였으니 모두 경계하는 글이다.

 

필자인 불앙거사(祓仰居士)의 차운시(次韻詩)를 소개하면

 

孤身誤落末時天   외로운 몸 세상에 나오니 말세라네
四面唯空無界邊   사면이 오직 공일뿐 한계나 가는 없네
富貴無心生處足   부귀에 마음 없으니 사는 곳 만족하고
風光貽樂愛林泉   경치가 즐거움을 주어 임천을 사랑하네
誠加敬是知修己   성에 경을 가하는 것이 몸을 닦는 줄 알지만
寂照神通未着鞭   적조와 신통공부는 손도 대지 못했네.
仰慕先賢作不及   선현을 앙모하나 따라 잡지 못하여
須探妙理自怡然   모름지기 묘리를 찾으면서 절로 이연하네.

 


⑶ 백우(百愚) 이혜손(李惠孫)


이혜손은 조선 중기 연산(燕山) 때 사람이다. 자는 유후(裕後)이며 호는 백우자다. 금성(金城)의 보리진(菩提津)가에서 살았다.

사람됨이 현묘하고 침묵하여 하루 종일 바보같이 지냈지만 그러나 의리를 궁리하여 구극에 도달하여 가만히 다가올 일이나 지나간 일을 알아 맞추었으며 멀리 보고 듣는 술법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전후에 둘도 없는 선비라는 칭찬을 들었다.

한족(寒族)에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집마저 가난하여 농삿일과 상업을 번갈아 가면서 해보았으나 호구에 급급하였고 이름을 드러내지 아니하여 새가 공산에 빠져버리듯 자취를 남기지 아니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백우자의 시에

 

閒望浮雲知世事   한가롭게 뜬 구름 바라보니 세상일 알겠고
靜觀潮水悟天機   고요히 조수 보노라면 천기도 깨닫겠네

 

라고 하였는데 그의 가슴속이 쇄락하여 자연 그대로의 모양임을 알 수 있었다.


금선자의 말을 빌리면 변지(卞沚)가 수사문록(壽四聞錄)을 썼는데 그 내용은 우리 동방의 도가류(道家流)를 총망라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환인진인(桓仁眞人)은 명유(明由)에게 도를 배웠고 명유는 광성자(廣成子)에게 배웠는데 광성자는 옛날 신선이다.

그래서 환인은 동방 선파(仙派)의 종주가 되며 환웅천왕(桓雄天王)은 환인의 아들이다. 선대의 뜻을 이어 아버지가 하던 일을 계속하였는데 바람과 비, 오곡등 삼백육십여가지를 다스려서 동방의 백성들을 교화시켰고 그 아들 단군(檀君)이 뒤를 이어 덕화를 행했는데 십년 만에 구이(九夷)가 모두 존경하여 천왕을 삼았었다. 쑥대로 정자를 얽고 버드나무로 궁궐을 삼았으며 머리를 새끼처럼 꼬고 소를 타고 다니면서 세상을 다스렸다. 일천 사십 팔년만에 아사산(阿斯山)으로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자손들이 계속 번성하였다. 그 당시 큰 나라가 아홉, 적은 나라가 열 둘이 있었는데 그곳의 임금은 모두 단씨(檀氏)였다. 그 뒤 문박씨(文朴氏)가 아사산에 살았는데 얼굴은 온화하고 눈동자는 모가 났다. 단군의 도를 이어 세상에 전파하였다.


영랑(永郞)은 향미산(向彌山)에 살았다. 나이 구십 세가 넘었으나 어린 아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로 깃으로 만든 관을 쓰고 철죽(鐵竹)으로 막대를 만들어 집고 다니면서 호산(湖山)에 소요했다. 이가 바로 문박의 업을 이은 사람이다.


마한 때 신녀(神女) 보덕(寶德)이 있어 바람을 타고 다니며 거문고를 안고 노래를 하였다. 모습은 마치 가을 물에 핀 부용화 같았는데 이가 영광의 도를 이었다.


신라 초에 표공(瓢公)이 있었는데 동해로부터 표주박을 타고 와서 신라의 명재상(名宰相)이 되었다. 옥을 볶아서 먹고 나무를 벗겨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바람과 비를 마음대로 부르고 새와 짐승을 뜻대로 부려먹었다. 끝에 설악산(雪岳山)에 들어가서 은거했으니 이 사람은 선가(仙家)의 또 다른 한파다.


가락국(駕洛國) 방등왕(房登王) 때에 암시선인(嵒始仙人)이 칠점산(七點山)에서 왔는데 얼굴이 깨끗하기가 차가운 옥과 같았다. 어류(語類)와 범음(梵音)을 가지고 왕을 초현대(招賢台)로 찾아와 보고서 말하기를 “임금께서 자연의 법칙으로 풍속을 이룰 것이다.”하여 태뢰(太牢)에서 식량을 주었으나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고 풍향(楓香)과 길경(桔更)을 먹고 살았으니 이 사람은 표공의 유파이다.


물계자(勿稽子)는 신라 때 이름난 신하로 공이 있었으나 상을 주지 아니하자 거문고를 안고 사이산(斯彛山)으로 들어가서 봄에는 나무 위에서 살고 겨울에는 굴속에서 살았다. 효공왕(孝恭王) 때 옥룡자(玉龍子)가 풍악산(楓嶽山)에서 만났는데 어린 아이의 얼굴과 살갗을 하고 술병을 들고 노래하고 있었다. 나이를 물으니 거의 팔백세가 된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칠점의 후예이다.

옥보고(玉寶高)는 학금산인(學金山人)이고 이순(李純)은 습은(習隱)의 고사로 모두 보덕의 분파다.
대세구칠(大世仇漆)은 배를 띄워 남해(南海)로 떠났고 원효(元曉)와 도선(道詵)은 불교에 귀의하였으나 모두 물계자의 여운을 받은 사람이다.


최치원(崔致遠)은 문장이 정묘하여 여러 사람 가운데 우뚝 솟았다. 십이 세에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이십팔 세에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승려인 정현(定玄)과 현준(賢俊)으로 도우를 삼았다. 그가 지나간 곳은 경주의 남산과 강주(剛州)의 빙산(氷山)과 합주(陜州)의 청향(淸香) 지리(智異) 쌍계(雙溪)등지로 모두 명승지다. 만년에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서 나오지 아니했는데 이 사람은 대세구칠의 여풍을 받은 사람이다. 그 뒤에 나온 청평산(淸平山)의 이명(李茗)과 두류산(頭流山)의 곽여(郭輿) 또한 그 파에 속한다. 또 최당(崔讜)한유한(韓惟漢) 또한 같은 무리다.


혜륵(惠勒)아도(阿道)흑호자(黑胡子)는 모두 불문(佛門)의 고인이다.

그러나 모두 도가의 영광(影光)을 취하여 익힌 사람들이다.

 

정호(丁皓)라는 승려는 고려 때 전서(典書)를 지낸 이백단(李伯摶)의 아우이다.
비록 불문에 몸을 의탁하였으나 진선(眞仙)이 되기를 바라면서 한음산(漢陰山)에 살았다. 과일을 따 먹고 나물만으로 연명하였는데 호를 모진당(慕眞堂)이라고 하였다.

어느날 강주정(降州亭)을 지나다가 한 소년을 만났는데 좋은 말이 끊임이 없어서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였다. 성명은 한식(韓湜)이요 백림거사(栢林居士)라 자호하였다.


벽 위에 시를 쓰기를

 

曾見先朝種李辰   일찍이 선조께서 오얏 심을 때를 보았는데
東風二十四回春   동쪽 바람 부는 이십사 회의 봄이었네.
題詩華表千年柱   화표의 천년 기둥에 시를 쓰고
灑淚靑山一掬塵   눈물을 푸른 산 한 웅큼의 먼지에 뿌리네
楓岸曉鍾神勒寺   단풍 언덕 새벽 종소리는 신륵사에서 오고
烟沙晩笛廣陵津   연기 빛 모래 저문 피리는 광릉 나루터네
秋風緩擊滄浪枻   가을 바람 조용히 창랑의 상아대 치니
樓上無人識洞賓   누 위는 아무도 여동빈 아는 이 없네.

 

그리고 나서 강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뒷날 김맹은(金孟隱)의 일록(逸錄)을 상고 해보니 식(湜)이라 부른 사람은 고려 명종 때 사람으로 그 아버지 순(順)이 정중부(鄭仲夫)에게 해를 입었기 때문에 산에 들어가서 도를 배웠다고 하였다.
연산군 정사년(1497)에 이종준(李宗準), 이증(李曾), 이계맹(李繼孟), 이수공(李守恭),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정희량(鄭希良)등 여러 사람이 여주(驪州)의 청심루(淸心樓)에 올라가서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다가 날이 저물자 손을 잡고 돌아오는 길에 평량자를 쓴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가 지은 시 수십 편을 자랑하다가 돌아갔는데 한 장의 쪽지를 떨어뜨리고 갔으므로 여럿이 주어서보니 시 한편이 있었다.

 

柳葉隨風升寶殿   버들잎 바람 따라 보전에 올라가니
滿庭桃李摠無顔   뜰에 가득한 도화 이화 모두 얼굴이 없네
冥冥一雁飛何處   아득하구나 기러기 한 마리 어디로 날아갔나
出沒寒溪鏡浦間   한계령과 경포대 사이를 오락가락 한다.

 

아!, 누가 유자광(柳子光)이 무오옥사(戊午獄事)를 일으킬 줄 알았던가. 여러 사람이 모두 화를 당했지만 홀로 정순부(鄭淳夫:희량)만이 관서로 망명하여 백우자를 따라 한계령과 경포 사이에서 화를 면하였다. 정순부 같은 사람은 기회를 잘 보는 기러기라고나 할까.


윤군평(尹君平) 또한 기이한 사람이다. 몸에 항상 지극한 열이 나서 쇠조각 두 세 개를 두 겨드랑이에 끼고 있으면 얼마 가지 아니해서 열이 나서 화로처럼 뜨거워진다. 그리하여 자주 차가운 쇠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아니하고 항상 목욕을 했다. 비록 동짓날이라도 정화수(井華水) 한 그릇을 등에 들이 붇고 나서야 편안히 지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처사 이유(李愈)의 자는 퇴부(退夫)다. 소두자(梳頭子)라 자호하고 지리산 자초동(紫草洞)에 은거하였는데 마을 경치가 사랑스러웠다. 매번 머리를 천 번씩 빗으며 시를 지었다.

 

木梳梳了竹梳梳   나무빗 빗다가 다 달으니 대빗으로 빗고
梳却千回虱已除   빗질이 천번이 되자 이 모두 제거 됐네.
安得大梳千萬雙   언제 큰 빗 천만 개 얻어서
盡梳黔首虱無餘   검은 머리 다 빗어서 남김없이 이 잡을까.

 

하였다.

비록 일사(逸士)이며 세상을 다스릴만한 재주가 있다고 하겠으니 대추꽃이 열매 맺는 것과 뽕잎이 실을 토하게 함에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다.


광진자(狂眞子) 홍유손(洪裕孫)의 자는 여경(餘慶)이다.

향리로 있다가 본 고을의 노역을 견딜 수 없어 물러나서 방외(方外)로 돌아다녔다. 금강산에 들어가서 시를 지었는데

 

身先檀帝戊辰歲   내 몸은 단군이 등극하신 무진년을 앞섰고
眼及箕王號馬韓   눈은 기자가 마한이란 나라를 세울 때까지 미쳤네.
今與永郞遊水府   지금은 영랑과 함께 용궁에 와 있지만
又牽春酒滯人間   또 봄 술 마시면서 인간에 머물겠네.

 

이 시는 사람으로 하여 신선의 흥취를 발하게 하고 있다.

 


⑷ 압모거사 전호인(鴨毛居士 田好仁)

 

동해 가운데 삼봉도(三峰島)가 있다. 두리산(頭里山)에 올라가서 바라보면 마치 소가 드러누워 있는 모양이다. 그 섬 가운데 천장산(泉長山)이 있어 꽃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져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진사 전호인(田好仁)이 배타는 기술을 익혀 바다를 건너 섬에 들어가 팔구 칸의 초옥(草屋)을 지었는데 회화나무 숲에 가려 있고 정사(精舍)가 깨끗하여 볼 만하였다. 주인이 압모도사(鴨毛道士)라 자호하고 당호를 수진당(修眞堂)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곳에 명(銘)하기를

 

인생이 얼마인가 흰 망아지 틈 속을 지나듯 한다.

이렇게 심신을 괴롭혀 가면서 먹고 삶에 급급할까.

공과 꽃이 이어서 이르고 물과 달이 뚝에 막히네.

매실 말하면 입에 신 맛이 돌고,

낭떠러지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 오네.

술의 좋은 맛은 드디어 독이 된다.

하나의 범골은 영대(靈坮)가 삭막하다.

우뚝 솟은 현관(玄關)을 왜 빨리 건너지 못하는가.

배나 대추는 날마다 기르고 가시나무는 속히 잘라버려라.

구슬 거울은 물로 씻고 단전에는 옥을 심게나.

정문(頂門)에 바른 눈은 육신통으로 다함이 없네.

용을 몰고 봉을 타서 푸른 하늘을 거닌다

 

 하였고

 

또 시하기를

尋思芳草逕   방초길 찾고자 생각하나
何處落花村   어디가 꽃지는 마을인가
觀我金塘粟   나의 금당의 조를 보니
芙蓉一朶存   부용 한 떨기 남아 있네

 

라 했다.

호인이 예를 다하여 밥을 구하는 도사에게 동자를 시켜 10개의 과일을 주었는데 과일이 돌처럼 단단하여 씹을 수가 없었다. 다시 동자를 시켜 도사에게 쌀밥 한 그릇을 주고 먹게 하였다. 반쯤 먹었을 때 도사가 ‘이 그릇은 정양사(正陽寺)의 불기(佛器)다. 돌려 주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호인이 도사에게 이웃에 살기를 청하여 도사의 승낙을 받고 호인이 감사한 뒤에 그 밥그릇을 돌려 주었다. 이 밥그릇은 절에서 제를 올리고 난 뒤 잃어버린 것이었다. 호인이 정양사로 가는 길에서 항상 그 반 그릇의 밥을 먹었는데 하룻밤을 자고 나면 항상 그 그릇에는 반씩 밥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뒤에 호인이 가솔을 데리고 섬으로 들어가 보니 그 도사는 이미 가버리고 옛 집은 이미 무너진 뒤였다. 바위에 시를 새겨 놓았는데

 

三韓田上舍 삼한의 전진사가
訪我黃藤島 나의 황등도를 찾았다.

 

였다.


황등도는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하여 슬픈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호인은 백 살을 살았으나 머리카락 하나 희지 아니했다. 항상 사람만 만나면 그 도사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음은 취병거사 편입니다

 

開硏究所有感

沈陰心沈 自陽古言 恨理萬聖 成月賢振 無日先復 志中往希 有胸繼唯
吟化業所 頭變秋講 白通天施 病坤學人 抱乾後往 平裡來力 生臆開賴

 

生平抱病白頭吟   평생병을 앓다가 백두를 읊네
有志無成恨自深   뜻은 있으나 이루지 모하였으니 감회절로 깊네
臆裡乾坤通變化   가슴 속건곤은 변화를 통하고
胸中日月理陽陰   가슴 속 해와달은 양과음을 다스리네
開來後學千秋業   오는 후학을 열어서 가르치는 것은 춘추의 사업이요
繼往先賢萬古心   지나간 성현을 잇는것은 만고의 마음이라
賴力徒人施講所   제자들의 힘을 빌려 강소를 설치하니
唯希復振聖言沈   다만 다시 성인의 말씀 잠긴 것을 떨치기를 바랄뿐

 

김 삿갓


老吟(노음) 늙은이가 읊다


五福誰云一曰壽(오복수운일왈수)   오복 가운데 수(壽)가 으뜸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堯言多辱知如神(요언다욕지여신)   오래 사는 것도 욕이라고 한 요임금 말이 귀신같네.

舊交皆是歸山客(구교개시귀산객)   옛 친구들은 모두 다 황천으로 가고

新少無端隔世人(신소무단격세인)   젊은이들은 낯설어 세상과 멀어졌네
.
筋力衰耗聲似痛(근력쇠모성사통)   근력이 다 떨어져 앓는 소리만 나오고

胃腸虛乏味思珍(위장허핍미사진)   위장이 허해져 맛있는 것만 생각나네.

內情不識看兒苦(내정부식간아고)   애 보기가 얼마나 괴로운 줄도 모르고

謂我浪遊抱送頻(위아랑유포송빈)   내가 그냥 논다고 아이를 자주 맡기네.

 

모닥 불 울음소리 장작 가슴 따다닥 딱

불의 눈 참회 녹아 눈물 붉게 넘치누나

넋 시름 걷어내는 불꽃 푸른연기 하늘나네

 

다음카페 태백선도에서 얻어오다.

출처 : 慧 雲 禪 房 - 直觀直說 - 觀煩惱見菩提
글쓴이 : 慧雲家主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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