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르마(Karma)와 사주명리에 대한 단상 ]
작년인가 쯤에
군부대의 사격장 근처를 이동하던
부대원들 중 한 군인이 사격장에서
날아 온 유탄에 피탄 되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던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안전조치의 미실행이나
안전 불감증 등의 기사들이
군부대의 무책임함과 부주의함을
질타하는 가운데 일반적인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즉 자신의 자식이 누가 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총탄에 숨졌음에도
그 부모님은 오히려 죽은 아들과 같은
젊은 군인들이 자신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온갖 고초를 겪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책임자를 반드시 밝혀내서 엄벌에 처해달라는
요청대신 자식과도 같은 군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선처를 호소했다는 기사를 보고는
정확한 사실관계를 따지기도 전에
참으로 대단한 참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시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말이 쉽지,
내 혈육이 그런 불의의 사고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면
악에 받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금강야차와 같은 모습을 보여도
누구 하나 그 분을 뭐라 할 수 없음에도
오히려 대승적인 차원에서
어쩌면 가해자일 수도 있는 사람들을
온 몸으로 껴안은 것이다.
그 분이 어떤 깊은 사려와 배려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참으로 범인들이 행하기 어려운
크고도 큰 사랑을 베풀었고
오늘의 주제인 카르마의 절대원칙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계신 분이라고 본다.
우리가 사람으로 몸을 받고 태어나서
길어야 100년 남짓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삶을 살아가면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왜, 무슨 목적으로
몸을 빌어서 이 세상에 왔는가를 생각하고,
또 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깊이 사색을 하면서
인생의 틀을 잡아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렇다고 이런 결코 가볍지 않은
화두에 몰입을 하다 보면
인생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쉬운 것이니
지나침까지는 아니더라도
거듭 깊이를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업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카르마(Karma)에 대한 청허의 조심스러운 접근이다.
Karma라고 하는 것의 어원이니
그 원래의 의미 보다는
현재 대다수의 인류가 인식하고 있는
개념이 훨씬 중요한 것이니
현재 통용되고 있는 Karma의 기본 개념은
전생, 현생, 다음 생을 아우르는
시간대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과거에 내가 행했던 선악기준의 행동들이
현생에 영향을 미치고
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들의
인과(Cause and Effect)가
내가 죽고 난 뒤 다음 생에도
어떤 형태로든 나의 인간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에 부정할 수 없는 기본적 틀을 깔고 있다.
일종의 등가교환의 개념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적용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확실한 물질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저 그렇고 그런 하나의 윤리 도덕적 개념에서
지금 착하게 살아야 내생에 조금은
더 편하고 막힘없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정도의 인생지침정도로 폄하해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아니면 심오한 우주의 법칙까지
들먹이면서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이 고통은 전생 또는
그 이전의 전생에서 빚진 것이
원인이라고 간주하고
또 그것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것일 경우 반드시
내가 갚아나가야 할
보상이요,
처벌이요,
인과관계에서의 청산이라고
보는 의견도 상당히 압도적이다.
수련을 깊이 하신 분이
일전에
‘현생의 삶은
전생의 인간생활에서 받은 성적표이며
그 성적대로 현생의
삶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이 Karma의 개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줄기차게
영적인 만남에서든
종교적인 활동에서든
가장 굳건한 뿌리로 작용하면서
교리의 적절한 설파와 교화,
기도의 필요성이나
선행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논리로 적용되기도 하는데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먼
명리학인의 입장에서 청허가 보는 시각은
일견 비슷하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이 카르마의 실제 연결성이나
발생에 대한 뚜렷한 과학적 증명사례나
누가 봐도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논리에 부합하는 사례는 없다.
기껏해야 전생을 기억하는
몇 몇 상담사례나 전
생퇴행 최면을 통해 나타나는
일부 사례에서 그 증거를 확보했다고
하는 논객들이 있기는 하지만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중력과 시공간의
개념과 가설처럼
실제 관측결과의 엄정하고도
면밀한 검증과정을 통해
기정사실화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전생퇴행 최면의 경우,
본인이나 시술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럴 듯한 부분이 많지만
그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증명 가능한 사실관계를 밝혀내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1980년대 초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던
김정빈씨의 소설 ‘丹’에서
실제 주인공으로 나오는
단학수련단체 (연 정 원)의 창시자이신
봉우 선생의 경우도
신이 전생에 중국의 한 마을에서
세상을 마감했으며
실제로 고도의 정신수련을 통해
자신의 전생을 읽어내고는
그 마을로 가서 나이 드신
마을의 원로들과 자신의 전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부분도 있고
인도에서는 고도의 요가수련을 거친
요기가 동굴 속에서 숨진
자신의 시체를 수습했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올법한 얘기도 있다.
현대인들은 헷갈린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주관적인 성향으로
솔깃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에이~! 무슨 하면서
비판적으로 넘겨버리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몫이고
청허도 명확한 논리나
검증된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선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한
주관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어쨌든 이러한 전생의 실체가 있다면
본 글의 근본취지인
카르마의 효용성이나
실제성이 제대로 작용할 것이며
실체가 모호한 상태라면
이 글의 내용도 유사하게
그런 정도의 모호함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글을 쓰는 목적이
카르마에 대한 것이므로
전생이나 현생, 그리고
내생의 실체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
이 카르마가 어떻게 작용할 것이라는 것과
이 카르마가 작용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존재적 행동적 차원에서의 이야기가 진
행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카르마의 기본 법칙은
내가 뿌린 대로 거둔다는(As You sow, So Shall You Reap) 라는
한마디로 요약 설명될 수 있다.
이 기본적인 대 원칙 아래에서
내가 행하고 움직이는 것에 따라
주변 환경이 전개되는 것이라는
창조의 원리가 들어가고,
긍정적인 시각과 자신을 낮추면서
매사에 임하라고 충고와 삶의
지혜적인 논리도 포함되며
우리가 육체를 빌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발전과
영적인 진화를 위한 것이라는
영적 레벨의 성장을 의미하는
행간도 들어가 있으며,
내가 주변 환경,
즉 그것이 가족이 되었던
사회조직이 되었던
직장이 되었던
일련의 책임을 강조하는
의식적 부담도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어떤 관점에서는
대원칙 보다 더 상위개념으로 볼 수도 있는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성 + 연결성에 대한
개념이 깊게 뿌리를 박고 있고,
여러 가지를 동시에 전개하면서
정신 사납게 살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해서 살아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현대경영학적
관점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본 글에서
청허가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배려와 베푸는 것에 대한
깊은 원리적 성찰이 내포되어 있으며,
지금 현재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현실에 대한
의미부여도 있으며
종교적인 개념관이 포함되어 있던
열반, 득도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내가 겪어야 하는 육체적 영적 고통의
과정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는 교훈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청허의 명리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본인의 노력과 선행,
타인에 대한 봉사와 명상,
순수한 기도
(기복이 아닌 공동체를 위한)를 통해
과거에 어떤 잘못된 행동이나 습관으로 인해
적체되어 있는 진득하기 그지없는
업장마저도 씻어낼 수 있다는
현재 지금 당장의
개개인의 생활습관과
고통이 동반된 노력이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현대 명리학문과
이 공부를 하는 분들이 지향해야 할
대승적 차원의 보시(無畏施)로 평가된다.
주변에서 흔히들 카르마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들 언급하는 내용이
‘ 지금 내가 내 남편이나 자식들 때문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것은
전생에 내가 그만큼 현재의 내 가족들에게
그만큼 또는 그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또는 스님들이나 전생과
윤회를 강조하는 종교에서 실례로 드는
전생의 악연이 현생의 고통이라는 논리도 사뭇 비슷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전생에 내가 옆집 아이를 괴롭혔기 때문에 그
옆집 아이가 지금 나의
직장상사로 자리 잡고 나타나
매일 나를 갈구고 괴롭히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까?
국내 굴지 재벌의 아들은
전생에 어떤 선행을 했고
그 선행들의 누적이 얼마만큼 대단했기에
지금 저런 홍복을 누리는 것일까?
청허는 이런 관점에서 카르마와
전생-현생-내생을 구분 짓고
선악의 기준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관점이며,
보다 큰 그림의
카르마의 구성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즉, 사사로운
인간 대 인간관계에서의 카르마도
사뭇 중요한 인자이긴 분명하지만
카르마의 원리와 개념이
우리 현생의 인간들에게 알려주고자 하고,
삶의 가치를 설정하는데 기준이 되고자 하는 것은
현재 내가 힘들더라도
남을 괴롭히거나,
사기를 치거나,
해치고 무시하지 말고
지금 잘하고 배려하고
품어주고 살펴주라는 것이다.
과거에 연연한 삶은
아무런 현생의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카르마의 원리가 분명하게 작동한다면
과거의 악업이 현생을 힘들게 하므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주변 사람들과 환경과
더 나아가 가까운 미래
또는 향후의 나와 가족,
주변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에 굴하지 않고
이겨내는 노력을 배가하며
그런 가운데에서도
나만 잘 살겠다고 남
을 등치거나 해하는 행동보다는
조금 더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고
보살피면 향후의 내 삶의 가치가 지
금은 비록 열등하더라도
훨씬 더 높고 고차원적인 레벨에서 승화되고
그것이 나의 영적인 성장과도
직결된다는 현실 중심주의에
입각한 행동지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 없이 많은 사주팔자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선천적 사주의 구성이나
자신의 특질, 그리고 대운과 세운의 흐름을
완전하게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명리학문의 튼튼한
인문학적 가치임을 인정한다면,
지금 내가 어렵고 힘들다고
자포자기나 나쁜 생각을 가지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이겨내고
보다 알차고 보람찬 나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행동하고 스스로 가꾸어
나갈 수 있을까를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제대로 된 명리학자요,
명리사이다.
한 낮 짧은 시간에 불과한
한 생에서 비록 내가 얻는 것은 크지 않지만
정당하면서도 합리적인,
그러나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상대방의 인생을
Reading하고
Guiding하며
필요할 경우
적절한 방향과 길을 제시하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원동적인 힘을
스스로 찾아가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카르마적 관점에서
명리학문이 개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지혜가 된다.
과거의 잘못이나 행동에
현재의 길흉이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모든 행동을 의식적으로
남들에게 잘하고
그런 일련의 행동들을 통해서
내생의 평안을 보장받는다는 식의
카르마에 대한 해석은 일견 맞는 부분도 있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긍정적인 평가도 가능하겠으나
진정 카르마를 이해하고
이 카르마의 법칙이
개별인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그 참된 효용성은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해하고
재도약하고 힘을 내어 보다 나은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원천적 힘으로 삼으라고
만약 절대적 존재가 있다면
그런 뜻으로 카르마의 법칙을 만들고
인간들이 살아가라는 지침이라고 보는 것이며,
어떻게 하면 그런
긍정적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은 다름 아닌
현재의 자신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그 구체적인 방법론에서는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나도 좋고
가족도 좋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과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내가 최선을 다해
나의 현재의 삶에 충실할 때
비로소 내생을 포함한
현재 이후의 삶에
밝은 빛이 드는 것이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먼저 그런 행동으로
한걸음씩 살아나갈 때
비로소 카르마는
전체적인 차원에서
선순환의 고리로 접어드는 것이며,
일부 신비학자들이나
영성단체들이 주장하는
참된 영적 성장을 이루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각론에서
개개인의 긍정적인
삶을 개척하는데
명리학문은 아주 훌륭한 도움이 되고
Advice가 되고
행동단계로 실제로 전개할 수 있는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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