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color-gray post-type-text paging-view-more">
본문 바로가기

청허의 명리즉설

청허의명리즉설(삶과 죽음을 대하는 마음가짐)






[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 ]


) --> 

지구의 모든 인간은

출생의 위대한 울음소리를 세상에 터뜨리면서

자신이 이 지구라는 행성에 몸을 받아 내려온 것을 알리고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이 유아시절,

소아시절을 거쳐 소년소녀의 감성 충만한 시기를 보내게 되며

인류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녀 이성에 눈을 뜨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성인이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일부 사람은

세상을 경험하기도 전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현실에 부대끼며 자신과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눈코 뜰 사이 없는 청년 중년시절을 보내게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이가 들었다는 느낌을 인지하게 되고

그 동안의 삶을 살아오면서

한 둘 쯤은 주변에 있기 마련인

주변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과연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의 목적이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라는 해답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눈뜨고 정신 차리고 나면

또다시 펼쳐지는 치열한 삶의 복마전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하게 보내기만 해도 다행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현실에 부대끼면서

퇴근길에 술 한 잔 나눌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게 되고

남편이나 아이들이 무사하게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작은 행복감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사건, 사고와 주변의 부고와

항상 가득한 죽음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다시 일어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기를 무한 반복하게 된다.

청허와 같은 연령대가 되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의 부음은 당연하고

대부분의 친구들의 친부모님이나

처가댁 시댁들의 부모님들이 세상을 등진 경우가 되어

문자나 소식을 통해 접하는 부음을 접하더라도

옛날처럼 그런 허무한 생각이나 상념은

다소 무덤덤해지기 마련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내 나이가 현재의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보면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이미 살아온 시간보다

현저하게 짧아져 있음을 느끼면

괜히 손에 힘이 빠지고

예전에 왕성했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도전의식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청허가 제아무리 불사의 약을 취한다 하더라도

2050년이 넘어가면 분명히

이 세상에 살아있을 확률보다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선산의 납골묘에

항아리채로

안치될 확률이 훨씬 더 높은 것이 분명하다.

성묘 때마다 벌초 때마다 보는 납골묘를 보노라면,

그리고 문득 문득 내가 들어갈 자리를 가늠해 보노라면

내 눈에 가득한 이 푸르른 하늘과

열기 가득한 태양의 온기와 산천의 초목들과

구름들과 코끝을 스치는 한줄기 바람도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 또한

사람이면 누구나 겪게 되는

한 순간의 또는 찰나의 생과 사,

삶과 죽음에 대한 잔잔한 명상으로 부족함이 없다.

과거에 그토록 치열하게 호흡 수련을 하고

정신적인 세계에 몰입했던 것도

어쩌면 언젠가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 자명한

이 육체적인 한계와 굴레를 벗어나서

나름 고상한 형태의 정신적 성상을 이루고자 했던

욕심이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어떤 경우는 밤을 하얗게 지새우면서

번민하게 만들었던 이유였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국내 굴지의 회사에서 나름 인정을 받으면서

순탄(?)한 회사생활을 하고

금전적으로 넘치지는 못해도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던 시절이었건만

유독 청허는 이런 생활이 결코 몸과 마음의

완벽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성향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는 늘 기인, 고승, 대덕,

자칭 도인이라 칭하는 지인들이 함께 했었고

그 사람들과의 대화,

기행적인 무애행이나,

철야수련 등을 통해

뭔가 물리적 법칙이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을 품은 세상을

어떤 형태로든 벗어나고자 했던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스스로 폄하하기도 하고,

또한 그런 체험적 경험을 통해서

지금의 명리학문에 기반을 둔

나름의 개똥철학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위인을 존경하고 많은 인류학적

도움을 준 천재들과

성현들의 일대기를 읽고 알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런 내용의 답을 해 준 기억이 난다.

그 특출한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서

나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보다는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당신이 현생에서 누리는

대부분의 문명적 혜택이 생겨나고 기초를 닦아서

지금 당신이 비록 넉넉하지는 않지만

끼니 곯지 않고 그런 질문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무릇 사람은 늘 생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그 생각의 바름과 그릇됨의 기준을 놓고 항상 갈등하게 마련이며,

궁극적으로 매순간을 현실이라는

물리적 화학적 세상의 벽과 맞닥뜨리면서 좌절도 하고

슬픔, 분노, 기쁨, 애절함 등의 희로애락을 겪게 되는 것인데

결국 최종적인 생각의 벽은

생사의 오묘하고도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거대한 벽에서 늘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부 유럽선진국에서는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

피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하게 자각하면서도

더 이상 피동적, 수동적으로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창하기도 하고

특정국가에서는 죽음의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법제화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것의

형이상학적인 의미와

현실적인 의미를 좀 더 파고 들어가 보자.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청허는 고대의 성현들이나 고도의 수련을 거친 도인들,

정신적 스승들이 가지고 획득한 그런 고상한 레벨은

꿈도 꾸지 못하는 아주 현실적이고 평범한 중년의 인간이며

여기서 청허가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듣기 어렵고 깊은 성찰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명리학문을 통해, 또한

그동안 짧지 않은 시간동안 늘 생각하고

별 것 아니지만

이런 저런 수련과 사색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거창할 것도 없고

깊이도 없을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분들의 성향에 따라 공감도 될 수 있고

또 정반대로 무슨 쓰레기 같은

개똥철학을 펼치느냐고 고개를

가로 젖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청허가 생각하는 죽음의 정의는

그동안 내가 사용해왔던

육체의 틀을 잠시 벗어나는 것이다.

가장 비슷한 예를 들면,

구름이라는 물 분자들을 품은 기체가

온도가 낮아지면 빗방울이 되어

대지를 적시고 작은 개천들이 모여서 큰 강을 이루고

다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온도가 높아지면

이 액체형태의 물 분자들은

다시 기체로 변화하면서

하늘에 가득한 구름을 형성하게 된다.

만약 이 액체형태의 물이

영하라는 매우 낮은 온도에

어느 정도의 시간동안 노출되면

얼음이라는 보다 단단한 고체로 변하게 된다.

즉 물 분자들은

온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기체, 액체, 고체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인데,

이 각각의 형태에 따라

그 상태가 가지는 자유도가 변하게 되며

당연한 이야기지만

고체형태의 얼음보다는

액체형태의 물이 이동자유도가 높고

얼음상태로 변하게 되면

체 형태의 물의 도움이나

중력, 경사도의 도움이 없으면

이동성은 거의 제로상태에 머물게 된다.

특이한 것은 액체 상태에서

고체상태의 얼음으로 변하면

단위무게가 가지는 부피(체적)

9% 정도 증가하게 된다는 것인데,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우리 인간이 가지는 삶과 죽음의 형태에서도

이러한 부피 또는 단위당 수용할 수 있는

배움의 크기는 자유도와 반비례하는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기체는 약간의 도움,

즉 바람이나 기압의 차이만 있어도

거침없이 이동할 수 있는 자유성을 가지는 반면

밀도가 낮음으로 인해

실질적 무게나 압력, 현실에 대한 영향력에서

액체나 얼음 또는 빙하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힘을 가지며,

고체 형태의 얼음이나 대형빙하는

자유도는 떨어지는 반면

움직였다 하면 그 움직이는 힘 자체가

주변의 환경이나 형상, 또는 물리적 현상에

매우 큰 변화를 이끌어내게 마련이다.

우리 인간의 구성이 그렇다고 보는 것이

청허의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간략한 형태 변화적 설명이다.

육체란 굴레를 가지고 있을 때

인간의 이동성, 물질적 자유성은

육체란 굴레를 벗어났을 때에 비해 매우 제한적이고

화석연료를 태우는 강력한

물리적 힘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힘이 든다.

하지만 육체의 굴레를 벗어나면

구름과 같이 가벼운 바람의 힘만으로도

또는 지역 간의 압력차이만 있다 하더라도

이동성을 가지게 되는데,

반대로 70킬로그램의 무게를 지닌 사람은

결코 액체 상태의 물을 딛고 걸어 다닐 수 없는 반면

같은 비중을 지닌 물(액체)형태의 인간이라면

예수의 기적처럼 물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제한성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고체 상태의 물처럼

인간이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에는

움직이는 매순간에 바람을 일으키거나

모래 밭 위에 발자국을 남기듯이

주변에 뚜렷한 흔적이나 변화의 결과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세 단계의 형상만으로도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의 본질은

상당한 이해력을 필요치 않는

손쉬운 설명으로 다가온다.

물이 증발하는 것과

인간의 육신의 탈을 벗어나는 것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그 증발된 물은

언젠가 조건이 맞으면

언제든지 다시 물방울 형태로 변하고

그 물방울 형태가 고체화 되어

새 생명이 몸을 빌어서 탄생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인즉,

불교나 고대인도의 힌두교,

그리고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

뚜렷하게 설명하고자 했던

윤회(Reincarnation)의 개념이 되는 것이며,

이런 단순한 설명만으로도

우리가 왜 지금 이토록 힘든 상태로

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이 해소가 되는 것이다.

자유도가 높은 기체 상태에서는

공간이나 지형의 제약을 훨씬 덜 받으면서

부대끼고 눌러지고 할퀴어지는 고통은 훨씬 작은 반면

그러한 충돌과 갈등의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무형의 정신적 단련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적인 측면에서는

그다지 살아있는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반대로 단단한 뼈와 살가죽으로 만들어진

육체를 지닌 상태에의 인간은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지형과 공간과 사회적,

국가적, 문화적 제약을 그대로 받으면서 무

엇인가 하나를 하려고 해도

늘 돈, 시간, 에너지를 투여해야만

그것을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매순간의 마찰을 통해

기체 상태에서는 가질 수 없는

뚜렷한 결과물을 산출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물질적 형상을 이루는

세포들의 수명이 다함에 따라

질병을 얻고 노쇠하게 되고

결국 육신이라는 허물을 벗고

다시금 기체 상태,

즉 내가 원래 내려왔던 그 상태로 환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삶과 죽음을

덤덤하게 상태의 변화의 구조적

이동단계로 본 개념이 된다.

조금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지만

아인슈타인 박사가 100년도

훨씬 이전에 언급했던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그 어느 우주의 물질도

빛 보다는 빠를 수 없다고 하며,

실제 관측결과로도 이 이론은

현재 불변의 법칙으로 채택되어 있다.

빛의 99% 속도로 달려가면서도

내가 보는 빛의 속도는 불변이며

내가 빛의 99.9%의 속도로

상대와 가까워진다고 해도

상대방이 내는 빛의 속도는 여전히 불변이다.

즉 빛의 속도에서 내가 가지는

방향성의 속도를 가감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속도는 내가 어떤 속도로 달리고 있더라도

상대적인 관측대상의 빛은 늘 불변의 속도를 지닌다는 것인데,

이 법칙을 일개 명리학자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실의 물리적 세계, 물리적 우주에서는

분명하게 확실하게 적용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언급하는

영적세계(만약 이것이 있고 청허가 전제로 내세우는 조건이 맞는다는 가정 하에)에서는

이 논리는 적용되지 않거나

전혀 다른 생소한 법칙으로 채택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빛은 질량과 에너지의 상관관계에서

상수의 값을 채택한 속도 값으로 나타나지만

질량을 개념이나 밀도의 개념을

초월한 어떤 상태가 있다면

당연히 이 법칙은 적용되지 않게 되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이며,

이런 상태가 우리가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 가지게 되는 영적 상태일 것으로 본다.

따라서 빛의 속도로 몇 광년을 가야

다다를 수 있는 현재의 물리적 기준의 거리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으며

생각 또는 사념이라는 의식의 단계가 있다면

이 또한 영적 세계와 동일한 상태로

간주할 수 있으므로 우리 인간이 죽음이라는 단계를 거쳐

무한의 자유도를 가진 영

적 상태(이 부분을 영성세계에서는 Astral이나

또는 더 상위개념의 Mental 또는 Causal 단계까지 세분하기도 한다)가 되면

광년의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수 있다.

농담이지만 청허처럼

엉뚱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사람이라고 놀리곤 하는데

만약 청허가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놀다가

지구로 몸을 빌어서 오게 되었다면

현재기준으로 초속 30만 킬로라는

우주절대의 속도로 달려와도

250만 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고

죽고 난 뒤 태어난 별로 돌아가려면

다시 250만년을 빛의 속도로

부지런히 가야한다는 어

색한 추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하다 보니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렸지만

이 부분에서 청허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죽음 이후의 세계나 상태는

우리가 일반적인 물리적, 현실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재단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결국 우리는 이러한 시간이라는 개념의

선상의 펼침 속에서 형태의 변화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왔으며

이 형태의 변화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니

죽음이라고 해서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내 몸의 물 분자, 단백질, 지방, 체액 등의 성분은

어떤 형태로든 지구라는 행성에서

거의 무한에 가까운 변화의 과정을

다시 거치게 될 것이며

그 몸을 잠시 빌어서 주인노릇을 하며

온갖 희로애락을 겪었던 우리의 본체는

貪瞋癡 (탐진치)와 오욕칠정의 과정을 통해

과거 생이 되었던 당시에

현생이 되었던 빚이 있었다면 빚을 갚을 수도 있고

잘못된 삶을 통해 빚을 탕감하기는커녕

오히려 몇 백배 더 큰 빚을 가지고 갈 수도 있으며

탕감에 더해 선행이라는

향후 내가 찾을 수 있는 무한 복리의 적금을

남겨놓고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우주 전체의 법칙이다.

내가 지금 어떻게 한다고

조금의 연장은 가능할지언정

불사의 불멸의 육체를 가질 수는 없다.

그리고 언젠가는

훨씬 더 높은 자유도와

이동성을 지닌 형태로 변화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결론은 의외로 자명하다.

삶과 죽음을 고민하고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이 살아있는 시간동안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을 늘 고민하고

스스로의 바른 지침을 세우고

행동하고 실천한다면

비록 언젠가 눈 감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슬픔보다는 뿌듯함,

다시 얻게 되는 자유로움을

진정한 빚 없는 자유로움으로 가득 채워

내가 맺었던 모든 인연들,

가족, 친구, 동료, 지인들과

현실적인 이별에 대한 슬픔은 있더라도

궁극적인 존재 자체의 행복함으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