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에서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일곱 가지 苦가 있으며
풀어서 쓰면
태어나고
늙어가며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네 가지 고통에
怨憎會苦(원증회고)라 하여
보기 싫고 미운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고통과
愛別離苦(애별리고)라 하여
사랑하고 마음을 준 사람들과의
헤어짐(이별, 사별 등)의 고통과
求不得苦(구부득고)라 하여
원하는 것을
제대로 얻지 못함으로서 생기는 고통의
일곱 가지 고통이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로
五蘊盛苦(오온성고)라 하여
이 모든 것에 대한 인간이 겪고
치러내야 하는 아픔과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난
원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니
여기서부터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이 시작되고 점철되며
그 구렁텅이에서 인생의 치열함에
좌절하고 절규하고 한탄하는 삶이 가중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다시는 인간의 몸을 빌지 않기 위한
윤회의 사슬을 끊어내는
해탈, 열반의 경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왕 불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풀어서 쓰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欲界(욕계)에 해당되는데
이 욕계에 머물면서 얻고자 하는
행복의 중심은 단연 돈과 명예,
즉 명리학용어로 財官이 된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지만
하나로 보기도 힘들고
그런 얽힘 속에서
우리는 매순간
나 자신의 힘처럼 보이면서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는 타인,
타물과의 부대낌과 받아들이고
내뱉는 숨결처럼 얽히어 살아가는데
조금 더 편하고 조금 더 나서고
잘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고 이러쿵저러쿵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면 아뿔싸 하는 탄식과 함께
마지막 숨을 거두고
다시 현생에서 지은 업보에 따라
내생의 삶이 어느 정도 결정이 된다는 것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우리네 지금
현재의 삶이고 매일의 일상이다.
사실 억울한 면이 적지 않다.
누구는 부모를 잘 만나서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나
별다른 노력이 없어도(물론 상대적이겠지만)
호의호식하고
누구는 꼭두새벽부터 졸린 눈 비비고
천근같은 몸을 일으켜 그야말로 뼈 빠지게
발바닥에 불나도록,
입에서 단내가 펄펄 나도록 고생을 해도
손에 쥐는 것은 몇 푼 안 되는
돈에 절절 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통장에 수천, 수백억 원대의 자산을 가지고
번쩍거리는 최고급차에 비서, 집사를 거느리고 사는 사람이라고
그 나름대로 불만스러움은 있겠지만
당장의 현실에 목말라 절규하는
대다수 서민들의 삶을 보면
이런 억울한 하소연은 나름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왜 이런 불평등하고 공평한 세상에서
내가 이러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마련인 것이다.
내가 이리 고생스러운 삶을 살고 있으니
내 자식들만큼은
좀 더 자유롭고 여유 있는 삶을 살게 하고 싶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대학 보내고
번듯한 직장에라도 보내게 되면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고
곧이어 시집, 장가보내기 위한
처절한 전투이전에 잠시나마
정신적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뚜렷하고도
명확한 차이를
전생의 선업, 보시, 과보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논리들이 가끔씩 제시되고 있다.
전생에서 또는 나의 부모가 음덕을 많이 쌓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면
그 덕을 지금의 생에서 보답 받는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좋은 선업을 많이 쌓아나가고
보시행이나 덕행을 꾸준하게 하면 내생이나
현생의 이후 시간대에 응당 그런 보답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설파한다.
기독교에서는 진심을 담은 기도를 통해
그런 복을 받고 매사가 주님의 뜻이려니 하면서
약간의 체념적, 그러나 기복의 개념이 존재하는데
뚜렷한 종교생활을 통해
현실의 일그러진 자화상에서
매일 매일 그려내고 마주치는
고통스러움을 이겨내려 하며
그런 활동을 통해 성직자들의
배는 불러만 간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열심히 기도하고 절에 가고
교회에 다니고 성당에 출석하고
신심을 내어 기도하고 절을 한다고
지금 내가 가진
아파트 평수가 두 배로 뛰고
동그라미 몇 개 안되는
통장잔고가 동그라미 아홉 개, 열 개
이렇게 붙으리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의 서민들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기도하고 스님의 법문을,
목사님의 설교를, 신부님의 당부를 듣고
그 확정적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약간의 정신적 안도감과 평안함을 얻는다.
응답하라 기도여~! 하는 갈망을
다시금 마음속에 그려내면서.
아마도 불교적 사상에 기반한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의 내가 받는
이 힘든 삶이
내가 이전에 저지른 과오와 실수와
카르마에 의해 돌려받는 것이므로
이 논리에 충실하게 자신을 적응시키면
상당히 순응적인 현실적 삶을 살 수 있고
다음 생에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가난하고
힘든 삶이 아닌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지금 다소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선업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
조금 부족하지만 남들에게 내가
더 내어주고 나누고 베풀려고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종교를 초월한 가장 숭고한
인생살이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청허는 믿는다.
그럴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만
이 세상이 조금은 덜 힘들고
조금은 더 아름답게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이런 어리석은 중생들과
갈 길 몰라 헤매는 양떼 같은 인간들에게
법문과 복음을 통해 법보시를 하고
성경말씀을 전파하고 설파하는
순수한 종교인들과 성직자들을
청허는 신심으로 존경하고 경외한다.
안 그래도 살기 팍팍한 세상에
이런 희망과 신심을 바탕으로
우리 같은 시정잡배들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종교가 가지는 몇 안 되는 순기능,
긍정적인 역할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삼성그룹의 故 이건희 회장은
그냥 단순하게 아버지 故 이병철 회장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당시의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는가?
물론 故 이병철 회장의 자식들 모두
금전적으로 힘들게 사는 아들딸은 없다.
모두가 국내의 대표적 기업의 owner로서
회장으로서 물질적인 면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고
그 복은 3대에 이어지고 아마도 4대, 5대로 쭉 이어질 것이다.
그러면 그 자식들 모두가 전생에
어떤 선업을 베풀었기에 이토록 현생에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부를 물려받고 사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인과관계가 뚜렷한
증거를 찾기 전에는.
하지만 불교의 법문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금의 삶을 대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은 명확하다.
베풀면서 살자.
부처님 오신 날에는
불교의 교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고
예수님 오신 날에는
또 그 때 상황을 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고.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普施(보시)를 언급하면서
이런 선업을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세 가지 정도(三施)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財施(재시)이다.
즉 금전적, 물질적, 경제적 도움을 남에게 주라는 얘기인데
불우한 이웃을 돕거나 성금을 내거나
공양을 대접하거나 춥고 헐벗은 사람에게
따뜻한 의복을 건네고 베푸는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선업의 하나라고 얘기할 수 있다.
두 번째가 法施(법시)이다.
法施(법시)는 금전적, 물질적인 도움을 다른 불우하거나
어려운 사람에게 건네는 것이 아닌 法,
여기서는 佛法(불법)을 알리고 전파하고
설파하는 공덕이라는 것으로
금강경에서는 온 우주를 칠보로 가득 채워서 건네는 것보다
한마디 법을 전하고 베푸는 것이 더 공덕이 크다는 의미로
이 法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無畏施(무외시)인데
두려움이나 무서움에 떠는 중생들을 계도하여
그 무서움을 없애주는 공덕이라는 뜻인데
뜻만큼이나 실제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내공이나 깊이 있는
철학과 혜안이 있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財施(재시)를 풍족하게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게
하려면 내가 그만큼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면 스님이 되어 법시를 하고
무외시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지만
이 또한 현실을 떠나 절대세계를 향한
此岸(차안)에서 彼岸(피안)으로 건너가는 여정이
결코 만만치 않음이
또 지금 당장의 거대한 걸림돌로 작용을 한다.
그러면 별 볼일 없는 재력과 내공과 지혜를 갖춘
청허가 지금 당장 베풀 수 있는 보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당장 가진 돈이나 물질적 여유와
돈이 없으니 財施(재시)는 어렵고
法施(법시)를 하려니 뭐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별다른 종교적 바탕이나 공부, 이력이 없어서
실질적으로 행하기 어렵고 행한다 하더라도 엉터리가 되기 쉽다.
그러면 無畏施(무외시)는 어떨까?
사람들로 하여금 막연한 미래사에 대한 두려움,
걱정을 조금이나마 벗어나서 이러이러한 방법과
저러저러한 설명과 도움말을 사주상의
구성을 보고 드릴 수 있는 작은 능력이 있다.
그래서 앞날의 인생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 더 나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덜어드리고
지금보다는 더 아름다운 꿈을 꾸고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자기최면이 될 정도까지
그 작은 역학적 방법을 알려 드릴 수 있다면
재시, 법시는 어려워도 무외시의 일부는
해드릴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인도에서 전해져 불교기도법의 하나로
안착한 Mantra 기도 법을 보면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 간절하게
갈망하는 염원을 기도를 통해 성취하고자 할 때
굳이 구분하자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하나가 염원, 즉 祈福(기복), 복을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인데
아마 절이건 교회건 성당이건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하는 기도의 구성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잘 살게 해주세요.
우리 아이 합격하게 해 주세요.
좋은 직장에 다니게 해주세요.
돈 벌게 해주세요.
병 낫게 해주세요. 등등 뭔가를 달라는 注文형 기도다.
여기서 우리가 심리학적으로 잘 살펴봐야 할 것이 있는데
이런 기도의 대부분은 부정적 현실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즉, 지금 내가 힘들고 아프고 돈 없고
시험에 합격할지 모르겠고
이러이러하므로
부처님이여,
주님이여,
성모마리아여,
제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하는 기도란 것이다.
이런 기도의 염원은 어쩌면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수는 있어도 바탕에 깔린
부정적, 파괴적 인식을 없애지 않는 한
기도의 효험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보는 것이
Mantra기도의 기본개념이다.
그러면 제대로 된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이 Mantra에서는 이야기 하고 있을까?
어떤 종교에서 하는 의식을 갖춘 기도가 되었던,
아니면 한민족 고유의 기도로 지금도 우리의 어머님들이
정화수 한 사발을 장독대 위에 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아 비비면서 행하는 북두칠성에 대한 기도가 되었던
또, 그냥 위급할 때 하늘에 비는 기도가 되었든
대부분의 기도는 지금 나의 상황,
그것이 나의 안위에 대한 것이 되었던,
자식의 행복, 출세에 대한 것이 되었던,
사랑하는 사람의 안녕을 위한 것이 되었던
현재나 다가 올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나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초자연적 힘을 주십사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바탕에는
지금 어렵고, 힘들고,
견디어내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하다는
현실의 부정적 현실이 바탕이 되어 있다.
지금 내가 잘 나가고
아들, 딸 좋은 곳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돈도 부족한 것이 없고,
별다른 욕심이 없는 상태나,
만사가 태평한 상태에서는
기도란 것이 사실 불필요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이런 난관을 이겨내고자 드리는 기도는
거듭 말하지만
매우 부정적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제대로 된 Mantra식 기도는
이 개념을 탈피하여 올리는 기도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내가 충분히 행복하고,
자식도 잘 되어 있고,
원하는 곳에(대학이 되었던 직장이 되었던) 들어가 있고
돈도 충분히 있고
나와 가족들의 명예도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강한 자기 확신이 든 상태에서
이 모든 것을 갖추게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린다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라야
제대로 된 효험을 볼 수 있다고 Mantra식 기도는
이야기하고 그렇게 하라고 넌지시 권유하고 있다.
무슨 귀신 달밤에 체조하는 소리하느냐
라고 의문을 가지실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청허도 이런 기도에는 도통 익숙하지가 않고
처음 이런 Mantra식 기도가 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다소 황당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고 따져 보노라면
현대 심리학에서 이야기 하는
모든 긍정적 삶을 가꾸어 나가는
기본적인 수단이나 방법이
강한 자기 확신이나 자기최면이라는 것이 있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자주 접하는
僞藥效果(위약효과)라는 것을 통해
어느 정도 일리가 있고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위약효과(Placebo)에 대한 이야기는
현대인이라면 모두가 한번쯤은 들어 봤음직한 이야기인데,
똑같은 두통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A그룹과 B그룹으로 구분하고
A그룹에는 진통효과가 실제로 있는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 같은 약을 처방하고
B그룹에는 똑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실제로는 아무런 진통효과가 없는 물질로
만들어진 약을 처방을 하는데
두 그룹에게는
모두 강력한 진통효과가 있다고
사전에 얘기를 해 둔다.
그리고 약(진짜와 가짜)을 처방하고 난 뒤에
두통이 사라졌는지를 확인해보면
A그룹이나 B그룹에서 각각 효과가 있다고
응답한 환자들의 비율차이가
전문용어로 유의차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 것을
주로 위약효과의 전부인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 맞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어릴 때 배가 아프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따뜻한 손으로 배를 만져주면
신기하게도 그 아프던 배가 거짓말처럼 나은듯한
느낌을 가진 경험들이 있을 것이고,
이런 유사한 사례들은
수없이 많은 이야기나 전설, 동화를 통해
실질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실제 사실들이 틀림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한 플라시보 효과를
플러스 효과로 본다면(즉 무용성분이 효용성분으로 나타난 것)
그 반대의 효과 즉,
마이너스 플라시보 효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 그런 경우가 있었는지는
정확한 사실관계에 대한 확인절차를 거치지 않아서
100% 정확성을 가지는 사례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양을 횡단하는 냉동원양어선의
냉동 창고에 한 밀입국자가 몰래 숨어
들어가서 창고 안에 갇혀 버렸는데
냉동 창고 안에는 먹을 것도 가득했고
이 밀입국자는 배가 항구를 출발하면
이 창고에서 나와서 배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생활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어찌 하다 보니
창고 문이 잠겨버렸고,
한 달간의 항해를 거쳐 배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선원들이 창고 문을 열어보니
그 밀입국자는 죽어 있었다는 얘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냉동 창고는 원래 고장이 나서
그냥 상온정도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죽은 밀입국자의 몸은 마치 얼어 죽은 듯이
온 몸을 웅크리고 주변의 온갖 포장재를 둘둘 감고 있었다는 것이다.
추측하건대 밀입국자는
냉동 창고이니 당연히 영하20도 이하의
저온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추위에 얼어 죽었다는 것이다
실제 창고 안의 온도는 냉동기능이
고장이 나서 얼어 죽고 싶어도 얼어 죽을 수 없는 온도였음에도
이 가여운 희생자는 자신의 고정관념에 휩싸인 나머지
그렇게 비명횡사하고 만 것이다.
이런 것을 청허는 마이너스 플라시보 효과라고 칭하고,
비슷한 예를 하나 더 들면
미국의 한 대학에서 사형집행이
얼마 남지 않은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고 한다.
이 또한 윤리적인 측면에서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이고 실제 그러했다는 논문이나
사실 확인에 대한 것은 구체적이지 않다.
어쨌든 이 실험에서는 사형수의 눈을 가리고
컴컴한 방에 눕히고 온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고 난 후,
팔목의 동맥에 차가운 금속을 베듯이 댄 뒤에 귀에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동맥이 끊겼으니 피가 흐르게 될 것이고
그 피는 침대 아래 양동이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소리는 똑 똑 이런 식으로 들린다고
사형수에게 주지를 시킨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뒤 다시
그 사형수에게 가보니 사형수는
이미 숨져 있었다는 얘기다.
여기에 함정이 있는데 실제로는
그 사형수의 팔목 동맥에는 금속만 접촉을 시켰지
그 어떤 신체손상행위는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사형수는 효과음으로 사용된
똑 똑 거리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간 피가
바닥의 양동이에 떨어지는 것으로 확신을 하고
실제로는 한 방울의 피도 빠져 나가지 않았음에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예를 보면
그 어떤 위해행위도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어떤 관념이 강하게 작용하면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앞에서 이야기한 위약효과와 작용원리는 비슷하지만
결과는 마이너스 플라시보 효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매일을 살아가면서
혹시라도 어떤 부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복을 달라고 절대자나
초자연적 존재에게 간절하게 기도를 하면서도
이런 어려운 상황이 나를 짓누르고 있으니
이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는
마이너스 플라시보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마음이나 관념으로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는 것인지
심각하게 한 번 돌아보기를 이 Mantra 기도 법은 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좀 더 쉽게 이야기 하면
기도를 함에 있어서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은
이미 성취되었고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이 간절한 바람의 성취에 대해서는
그냥 처삼촌 벌초하듯이 건성으로 염원을 거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집중과 자기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인데
사실 말은 쉽지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럴 때는 집중의 힘을 길러야 하고
이 집중을 위해서 우리는 명상을 하고
삼매에 들고 불교용어로
般若波羅密多(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
기독교나 천주교에서 이야기하는
간절한 信心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종이나 물체를 아무리 햇볕에 내 놓아도
그것이 불이 붙으려면 별도의 도구나 라이터
불을 붙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만
돋보기로 태양 빛을 모아 특정지점에
照射(조사)하게 되면 쉽게 불이 붙는다.
우리의 집중력에 아주 좋은 본보기인데
이런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히거나
산만한 심신을 가지게 되면
마음만 간절할 뿐 실제의
기도효험은 물 건너가게 된다는 것이
이 Mantra기도의 핵심내용이다.
한 때 Secret이란 책이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적이 있다.
무엇이든지 내 자신이 염원하면
온 우주가 감응하여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게 한다는 내용으로 된 것인데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현혹되어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랐는데 결과가 없다고,
효과가 없다고 쉬이 포기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헛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매사가 이루어지고 성공한다면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
거지, 노숙자,
몸 파는 사람들은 아예 없어지고
진즉에 모든 것이 풍요로운 유토피아의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다.
이런 불일치의 원인은 감히 추측하건대
자기 확신과 집중력의 정도에
많은 괴리가 있다고 청허는 생각한다.
물론 청허도 그런 고도의 집중력이나
자기 확신의 단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 命理學을 공부하고
어설프기 그지없는 실력으로
이런 글을 쓰면서 스스로 그런
단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왕 기도할 것이면 위에서 언급한
Mantra식 기도를 하려고 노력해보자.
즉 이미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는
강력한 자기암시와 최면을 걸고
그렇게 그런 좋은 결과를 있게 해 준
절대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는
기도를 지금부터 시작해보자.
欲界를 넘어 色界, 無色界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온갖 생물, 미생물들이 할거하는 이 欲界에서나마
내가 이루고자 하는 행복,
자유로움을 가지고 성취하기 위해
집중력을 기르고
그 집중력을 통해 하나씩 이루어 나가보자.
命理學은 色界의 18天나이나 無色界의 4天은커녕
欲界의 6天중에서도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
인간계의 단순한 길흉판단이 아니라
이왕지사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현실세계에서
나 자신의 부족함과 과함,
장점과 단점을 알고
현실세계에서
가장 충실하게 삶을 엮어나갈
지혜를 주는 것이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불교나 기독교 등의
기존 종교의 세계관으로 의식을 확장시켜주는
도우미나 마중물 역할도 톡톡히 할 수 있음을
이런 祈禱/普施(기도와 보시)의
교훈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命理學으로 득도는 어려워도
득도를 위해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그런 그릇은 되는지,
그릇이 못된다면 그릇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과 행위를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기독교/천주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이런 현생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종교적인 관점과 현실적인 관점,
그리고 즉각 효과를 보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하고 고도의 집중력으로 해야 할 것은
무엇, 어떤 것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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