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집사람과 저녁 아홉시쯤 백화점 마감을 하고 축 처진 어깨를
서로 기대면서 집으로 오는데 집사람 휴대폰이 울린다.
보아하니 집사람의 친구.
나와도 결혼하기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고,
나와 집사람이 소개해서 나의 대학교 동기이자 회사동료인
친구와 결혼을 했는데 최근 들어,
아니 한 십 오년 전부터 뭔가 잘 풀리지 않는지 인생의
변화 부침이 매우 심한 사실상 이혼상태에서
두 아이를 힘들게 키우고 뒷바라지 하고 있는 있다.
큰 아이는 대학도 못가고 독일에 자동차 기술 배우러
간다고 준비하고 있고
둘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하고 이런 저런 사회경험을 하다가
내년도 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있으며,
본인은 수학과외학습을 쭉 해오다가 나이가 드니 그것도
못해 먹을 짓이라며 부동산도 기웃거리고 보험도 기웃거리고
한마디로 닥치는 대로 살고 있는데
시댁과 남편과의 사이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신랑이 벌어다 주는 돈은 늘 부족하고 아이들도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 있으며 신랑이
늘 마마보이라면서 불평불만이 많은 상태다.
해서 툭하면 집사람한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위로도 받고
누군가 터놓고 상대해주는 사람도 잘 없으니
뭔가 일이 꼬이면 밤 낮 없이 전화를 하고 근처
카페에서 수다를 떨면서 나름대로의 스트레스를 풀곤
하는 것을 잘 아는지라 집사람이 뭐라고 얘기하기 전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녀오라고 사인을 줬다.
집사람도 하루 종일 서서 고객 상대하느라 피곤할 터인데
그래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다녀온다. 열
두시가 다되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집사람에게 건성으로 물었다.
“ 오늘은 뭔 일이래?”
“...”
집사람이 대답을 안 한다는 것은 오늘 제법 걱정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이럴 때는 그냥 은은한 부처님의 미소를 지으며
‘ 그래, 천천히 얘기하소. 당신이 말하고 싶을 때 해야지’
간단하게 씻고 나온 집사람이 냉장고에서
벨기에산 말텐스 비젠 에일 맥주를 잔 가득히 부어서 가지고 오며
“한 모금 할래요?”
하면서 잔을 넘기기에 한 입 쭈~욱 들이키니 풍부한
에일 향에 걸쭉한 목 넘김이 가히 일품이다.
이러면 이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게 된다.
집사람 얘기인즉,
하도 일이 안 풀리고 돈은 바짝 마르니 할 수없이 부동산
사업한다고 고가에 리스를 했다가 인수한 제네시스를 팔았단다.
그리고 2천 몇 백 만원 받은 차 값으로
다시 중고 그랜저를 한 대 구입하고
용하기로 소문이 난 무당을 찾아갔더니 굿을 권했단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 수 없이 굿 비용으로
팔 백 만원을 내고 무당이 주는 신주단지를 모셔 와서 집에다 두니
마음이 좀 편안해져서 어쩌고저쩌고 뭐, 그런 식이다.
속으로
‘ 아이쿠, 또 헛돈 날렸구나.
안 그래도 없는 집안이 무슨 돈이 있다고
천만 원 가까운 돈을 내서 이틀 동안 난리 굿(정말 쓰고 보니 그렇다)을 하고 저 모양인가.’
그 집 사정을 속속 들이 잘 아는 집사람도 내심
헛돈 쓴 것에 속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무당 치마폭으로 들어간 돈이 결국 신주단지 하나로 변신했고
그 신주단지 하나에 내심 편안한 마음을 가졌다니
그 돈을 받아낼 재주도 배짱도 사실 없다.
그리고 내가 그럴 처지도 못되고.
이내 방금 들이킨 맥주가 아주 씁쓸하게 뒷맛으로 내리 돈다.
몇 달 전에 하도 답답하다기에 복채 안 받고
그 집 네 사람 사주를 봐 준적이 있다.
기억하기에도 부부간의 사이가 매우 불량하게 형성되어 있고,
아이들은 공부와는 아주 거리가 멀기에
무슨 기술이든지 배워서 사회에 나가라고 얘기해 주었고,
집사람 친구에게는
돈을 쫓지 말고 내가 지금 해서 가장 즐거운 것을 선택해서 하다 보면
내년쯤에는 그 취미 생활 같은 선택이 아주 괜찮은 벌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절대 이런 곳, 저런 곳 기웃거리지 말고 애들 잘 돌봐주고
좀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라고 얘기했었고,
남편은 어쨌거나 남편이니 원수 같은 마음보다는
친구처럼 생각하면서 기대도 접고
그냥 지내는 것이 지금으로는 최상이며,
한 몇 년 지나면 다시 괜찮아질 것이니
이혼과 같은 극단적 선택은 안 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정도로 사주를 봐 준 적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큰 아이는 자동차정비학원에 다니면서 준비를 하고 있고,
둘째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검정고시라도 준비하고 있다니
그나마 괜찮은데
본인이 정작 별의 별 것을 다하고 돌아다니고
돈을 낭비하고 있으니 어찌 맥주 맛이 쓰지 않겠는가.
그 년의 무당도 사람 좀 봐가면서 돈을 치댈 것이지.
거의 알거지나 다름없이 차 팔아서 준비한 돈을 그렇게 해 먹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 요상하게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다시 든다.
돈을 안 받고 친구라고 선심성으로 봐 준
정성 가득한 사주 풀이는 뒷전이고
결코 적지 않은 돈을 갔다 바치고 얻어 온 마음이 편하다는 얘기.
꼭 그 무당만 폄하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비싼 돈을 줘야 뭔가 가치를 안고,
현재의 문제점이 풀려 나가고,
앞으로 무궁무진한 복이 들어오리라 생각하고
용하다고 소문나면 치맛바람 일으키면서 달려가서
절하고 돈 뜯겨도 굿했으니 뭔가 잘 안 풀리겠나
하는 기대심리로 가득 찬 연약한 우리네 서민들의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작년에 친한 친구가 사주를 봐 달라고 해서 정성을 다해
간명한 내용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A4 용지 세장에 걸쳐 자세하고
기록해서 넘겨 준 적이 있다.
그리고 며칠 쯤 뒤엔가 그 녀석 차를 타고
상가 집에 가는데 뒷좌석 바닥에 팽개쳐진
내가 정성을 다했던 간명 파일이 눈에 띄었다.
슬그머니 집어서 보니 내가 준 그대로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
나는 친구랍시고 정성을 다해서 다섯 명 가족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하루 종일 작성한 것을
이 친구는 그냥 받은 그대로 뒷좌석 바닥에 빈 콜라병과 함께
덩그러니 놓여 있으니
아무리 내공을 쌓은 나지만 짜증이 폭발적으로 일었다.
간신히 숨 고르고
“ 너 이거 아직도 안 봤나?”
하니까 우물우물하더니 바빠서 아직 못 봤단다.
내 성격을 아는 놈인지라 식은 땀도 흘리면서
뭔가 변명거리로 둘러대는데,
뭐,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상가 집에 가는 중이라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았는데
안사람이 워낙 독실한 교인이라서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하고 나자.
내가 참 또 헛짓 했구나 정도로 마음을 다잡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친구가 나중에 자기 안사람이
소개를 받았다고 하면서 팔공산 자락에 있는 안X당이라는
기가 막히게 보는 여자 점쟁이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한다.
기실 뚜렷하게 바쁜 것도 없고,
나는 상관없지만
혹시나 다른 곳에서는 이 친구 간명을 어떻게 하나 싶어서
가는 날 아침에 내가 봤던 간명내용을 다시 찬찬히 읽어 보고
점심 무렵 이 친구와 부인,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 함께 그 곳으로 갔다.
파계사 넘어가는 길목을 돌아서니 대로변에 커다랗게 간판도 붙어 있다.
도착해 보니 팔공산 풍광을 안고 멋들어지게 지어 놓은 전원주택형 집을 보니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차도 독일제 Audi에 온갖 첨단 경비시설까지 있고
마당에는 작은 연못도 있다.
대충 봐도 꽤 투자를 많이 한 집이라는 감이 올 정도였다.
인터폰으로 문을 열고 대기실에 들어가니
서너 명의 아줌마들이 수다가 한창이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내어주는 향긋한 수정과 한잔을 마시고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듣고 있는데
그 내용이 아주 가관일색이다.
여기서 점을 봐주는 이 보살님이야말로
신력도 대단하고 과거사는 거의 100% 맞추며
앞날도 정확하게 맞추는데
누구 시아버지가 죽는 달까지 맞췄다는 얘기,
여기서 권 하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고 나니 돈 복이 터졌다는 얘기,
부적의 효험이 너무도 좋아서 정신병 증세를 보이던 아는 사람
딸이 부적을 몸에 지니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졌다는 얘기 등등,
귀가 얇은 사람들이 들으면 정말 훅~!하고 갈 얘기들 일색이다.
그런데 가만히 눈치를 보아하니 네 명의 아줌마 중에서
실제 여기에 점 보러 온 사람은 둘이고 둘은 그야말로 바람잡이다.
나는 단박에 그 눈치를 채고는 그 노사연 닮은 아줌마에게 물었다.
“ 아줌무이, 그 정신병 딸 나았다는 아시는 분 전화번호하고
이름 좀 알케주이소. 나도 내 조카가 조현증으로 지금 골치가
아픈데 이야기나 한번 들어볼라 캅니더.”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어가면서 물으니
당연지사 전화번호는 모른단다.
하하하..아는 사람이라면서
친한 사람이라면서
전화번호 모른단다.
그냥 더 이상 아~! 그래요 하고 넘어갔지만
친구내외는 연신 껌뻑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마침 우리 차례가 되어 같이 들어갔다.
점보는 사람은 둘인데
세 명이 그것도 아줌마 하나에 아저씨 둘이 같이 들어오니
좀 의아스럽게 쳐다보는 보살의 눈치를 애써 무시하고
나는 보살이 앉아 있는 테이블 먼 맞은편에 앉아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봤다.
한마디로 엉터리 그 자체였다.
생년월일과 출생지는 정확한 사주간명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보인데
출생지는 아예 묻지도 않고,
지지에 숨어 있는 초기, 중기, 정기의 구분 없이 그
냥 정기로만 만세력으로 뽑아서 싸인펜으로 쭉, 쭉 적는 것인지,
그리는 것인지 써내려 간다.
그리고는 단박에
“ 백호대살이 들어있고, 고신살, 현침살,
역마살이 들어있으니 올해 수술 교통사고 조심 해야겠네요.
그리고 지금 이름으로는 복이 안 들어오니, 개명을 하시는게 좋습니다.”
이런 식의 사주풀이를 계속한다.
결국 사주를 봐주는 복채는 3만원에서 5만 원 정도 밖에 안 되니까
단가가 좀 비싼 개명으로 유도를 한다.
벽에 붙어 있는 복채 표를 보니 개명은 한 사람당 33만원이고,
부적은 경우에 따라 100만원에서 500만 원짜리도 있다.
내가 봤을 때 이친구의 사주구성은
흉포한 흉신인 편관이 제법 강력한데
이 편관을 잘 제어해주는 식신과 인성이 적절하게 자리 잡아서
그다지 나쁘지 않고 어딜 가든 제 몫은 충분히 하는 친구다
(54세의 나이에도 아직 굳건하게 삼성에서 최고참 부장으로 버티고 있다.
물론 동년배들은 벌써 집으로 다 갔다.)
이름도 수리 오행상이나 음령 오행으로 볼 때
손 볼 필요 없이 잘 지어진 이름이다.
내가 한껏 눈치를 줘서 추가 지출은 없이 그냥 나왔는데
나올 때 내 뒤통수에 따갑게 꽂히는 보살의 눈 빛 레이저는 지금도 서늘하다.
나도 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제일모직에서 나와서 제주도로 직장을 옮길 때
당시 대구에서 꽤 이름이 높았던 역술가에게 한번 사주를 본 적이 있다.
내려가면 대박을 터뜨리고 제주도에서 아주 유명한 저명인사가 될 것이니
어서 내려가라고 했던 기억인데,
내가 공부를 하고 난 뒤에
나의 사주를 다시 곰곰이 풀어보니
제일모직을 나와서도,
제주도에 내려가서도 안 되는 대운이고 운세였다.
그리고 그 역술인에게 덤으로 딸의 개명까지 부탁해서
받았는데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성명학 이론으로는
전혀 엉뚱한 개명이 되고 말았다.
웃지 못 할 희극이 도처에서 거의 매일 벌어진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혹여나 이글을 읽고 계신 분들이 어쩌다
철학관이나 점집, 무당에게 가서 고가의 부적이나 개명을 해야 한다고
권유를 받게 되면 일단 알겠다고 하시고 저에게 생년월일시와 출생지, 한자 이름을 보내주시라.
내 능력으로 안 되는 수준이면 그렇다고 말씀을 드릴 것이고,
최소의 비용으로 합리적인 운명개선의 힘이 되어 드릴 것이다.
(절대 장사하는 것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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