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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건강

습작-정전(停電)

 

 

 

미자는 답답한 마음에 다시 휴게실 끄트머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정수기로 다가갔다.

온수와 냉수,정수모드로 되어 있는 정수기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커피를 마시자니 다시 정수기 옆에 있는 서랍을 열고 녹차와 둥글레차, 그리고 커피믹스가 담겨있는

조그만 소쿠리를  꺼내야 하고 또 여덟명이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의 눈마주침을 피한채 천정도 보다가

가만히 있는 휴대폰이나 고급스러운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혼자서만 커피를 타서 먹는 것도

조금 뭣했다.

 

그렇다고 달랑 종이컵에 생수만 받아서 오려니 의자에서 일어나서 왕복하는 몇 걸음 안되는 노동이

조금 낭비스럽다는 생각도 들어서 머뭇거리다가 무심결에 나이에 걸맞지 않은 높은 억양의 목소리로

" 커피 마실 사람~!!!" 하고 애써 목청을 높였다.

 

"..."

"..."

 

아무도 즉각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비교적 나이가 어린 종숙이와 은주가 갑작스레 침묵을 깨는 목소리에 의아한 표정으로 미자쪽을

돌아 봤을 뿐 그 어느 누구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 썩을 년들' 하고 속으로 욕을 되뇌이고는 그냥 온수 조금에 냉수를 타서 아까 앉았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니 여드름이 가득한 얼굴에 올백으로 넘긴 화장기 없는 맨낯의 정이가

갑자기 생글거리면서 미자를 쳐다 올려 보았다.

 

" 저기..미자 아줌마.."

 

미자는 자기를 부르는 나즈막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인양 조금은 뜨악하게

바라보면서 두 눈을 잠시 크게 뜨면서 대답대신 정이를 바라보았다.

 

그 몸짓에 정이가 주저주저 하면서 다시 말을 어렵사리 이어갔다.

 

" 저..아줌마..저..떡이 먹고싶어요.."

 

이게 왠 생뚱맞은 소리? 갑자기 떡은 무슨 떡이 먹고 싶다는 말이며 또 자기가 먹고 싶은 떡을

왜 나에게 얘기를 한단 말이지?..나보고 사 달란 얘긴가..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들이 재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면서 뭐라 말할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미자는 미지근한 물을 한모금 가볍게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 정이가 무슨 떡을 먹고 싶은데?"

무의식적으로 물어보면서 미자가 또다시 특유의 잔머리를 굴려 보았다.

 

' 얘들처럼 젊은 애들은 단 것을 좋아하니까 ' 라고 생각을 첫머리를 잡기도 전에 재빨리

정이가 제법 공격적으로 다시 대답을 해 왔다.

 

" 떡이란 떡은 다 먹고 싶지만요..지금 당장은 찹쌀떡이 먹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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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측을 대표하는 기구의 수장역할을 거의 8년 가까이 하고 나면 의례적으로 회사에서는

사내금고의 이사장 자리정도를 주면서 정년까지 남은 몇 년간의 시간을 조금은 육체적으로

편안하게 대인관계에 중점을 두면서 스트레스도 적고 그동안 닦아 놓은 노사관계의 노하우로

적절한 타이밍에 자문도 해주고 대출받으러 온 사원들과 차도 한 잔 하고 외부의 새마을 금고의

동향이나 제 2금융권의 예금과 대출금리 동향이나 살피면서 필요하면 이자율도 조금 조정하는 등의

폼도 살고 자신도 향후의 삶에 대해 조금은 사색할 수 있는 자리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막상 차기 대의원 선거가 끝나고 후임자들이 모두 선출이 되고 공식적으로 업무를 넘겨

주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었지만 회사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담당부서를 찾아가서 눈치를 보고 팀장을 찾아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에둘러 하면서

의사를 넌지시 전해도 별 긍정적인 답변이 없었고

 

대통령의 이취임식 정도는 언감생심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조금은 지난 8년간 노사관련해서

불미스러운 일이 전혀 없었던 자신의 노력이나 공적을 생각하면 꽤나 근사한 식당에서

선물도 받고 후임자들에게 덕담도 나누어 주고 낯 간지럽긴 하지만 회사측이나 사원측의

공치사도 듣고 싶었지만 그 또한 당시의 썰렁한 회사분위기로 인해 가까운 부서의 몇 사람

정도만 참석한 조촐한 회식자리에서 삼겹살에 쓴 소주 몇 잔으로 끝낸 것은 그렇다 쳐도 좋았다.

 

과거 수십년간의 관례를 깨고 정도현 대리가 가야 할 곳은 자신이 몸 담았던 부서의 현장직군이었다.

마흔 두살때 노사대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위원장 역할을 맡았었고 이제 오십이 다되어 힘도 별로 없고

다리근육도 다 풀어진 자신을 다시 먼지 뽀얗게 뒤집어쓰고 커피한잔 여유롭게 마시기 힘들고,

담배 한대도 눈치보면서 피워야 하는 현장직군에 보낸 처사에 대해 기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었다.

 

그리고 그 현장직군도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참아가면서 두어달 여를 버티어 보니 사람의 몸이란 것이

참으로 희안하게도 묘한 것이 또 적응이 되더라는 것이다.

 

수천도를 넘는 용암처럼 끓던 속앓이도 어느덧 현장일에 몰두하여 사그라질 즈음에 이 놈의 팀장이라는

자식이 다시 다른 부서로 발령을 내었다. 그러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얼굴에는 부처처럼 온화한

미소를 띄면서 마치 자기가 정도현 대리를 아주 많이 생각해 준 것 처럼 은근히 내색을 하는 것이 여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평소에 그다지 평이 나쁜 팀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찌 마음 좀 붙이고

막 적응을 하려는 사람에게 몸이 불편해 보인다니 어쩌니 하면서 생판 겪어 보지 못한 다른 부서로 가야

한다니 기가 막히고 머리에 스팀이 고압의 증기기차처럼 막 새어나왔지만 정도현 대리 역시 원래 마음이

양반중의 양반이고 또 내심 현장부서보다는 육체적으로 조금은 더 편한 부서라는 생각이 들어서

팀장이라는 자신보다 두어살 어린 녀석에서 쓴소리 한마디를 뱉어내고는 그러겠다고 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참고 또 참으면서 생소한 부서에서 판정업무를 새로이 배워야 했다.

 

남자 나이 오십이면 눈도 가물가물하고 판단력도 그다지 좋을 것도 아님을 잘 알텐데 자신을 이런 부서로

보낸 임원이나 팀장, 그리고 인사부서장도 괘씸하고 나이 다 먹어서 왜 이런부서로 왔느냐는 식으로

다소 뜨악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나이도 한참 어린 여사원들이나 얼마나 못났으면 노사대의원기구의 수장으로

8년을 하고도 제 자리도 못 찾아먹고 현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판정부서로 튕겨 가는가 하는 현장부서원이나

동료들의 머쓱한 시각들도 모두 정도현 대리의 심기를 매우 매우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 날 아침도 그랬다. 아침 점호시간이 끝나고 판정을 해야 할 물량이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어서

잠깐 짬을 내어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 뽑아들고 건물 뒷편의 고즈녁한 파고라에서 담배 한 대 진하게

피워물고 판정대로 돌아오기까지 약 10분정도 소요되었을까? 갑자기 정도현 대리와 비슷한 연배이지만

이 회사에 들어 온지는 5년밖에 안되면서 얼마전 연말 인사 때 반장으로 임명된 윤미자라는 아줌마가

눈을 부릅뜨면서 다가와서는 내일부터는 무조건 근무시간을 준수해야 하며 자리를 비울 때는 반드시

자기에게 어디에 가며 시간은 얼마가 소요될 것이라는 내용을 일러주고 가야한다고 자기딴에는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안그래도 열 받히고 스팀 올라왔지만 체면이 있어서 안으로 삭히고 또 삭혀 왔지만 30년을 근무해왔고

또 직책은 자기가 반장이지만 직급은 사원인 아줌마가 직급으로 따지면 몇 단계 한참 높은 정도현 대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완전히 이 인간 정도현이를 아래로 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넘새스러워서 미자 아줌마가 뭐라 할 때는 가만히 있었지만 판정대에서 판정해야 할 물량이 서서히

지나갈 즈음 정도현 대리는 그간의 끓고 있었던 용암덩어리를 더 이상 참다가는 자기가 용암에 데여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고 속으로 시팔~! 을 몇 번이나 외치다가 미자 아줌마가 있는 판정대로

달려 갔다.

 

" 야~! 이 아줌마야..네가 이 회사에 근무했으면 몇 년을 했냐?

  내가 이 회사에 근무한 것이 올해 30년째다..그동안 내가 부서장이나 임원한테도 너 따위 한테

  들었던 그런 모욕적인 언사는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또 네가 뭔데 사원주제에 반장이랍시고

  한참을 위로 더듬어야 올라올 수 있는 대리한테 그 따위 소리냐?

 

  네가 잘 나면 얼마나 잘 났길래..내 너를 두고 두고 씹겠다..알겠나? 이 싸가지 없는 여편네야~!!

  반장이 그렇게 대단한거냐?..나는 이미 십오년 전에 네보다는 훨씬 더 큰 현장조직에서 반장을

  칠년이나 했지만 윗사람들한테는 진짜 깍듯하게 했는데..정말 내가 참고 살려 했는데..너 두고

  봐라..내가 내이름을 걸고 널 갈바주마.."

 

  갑작스러운 고함소리에 주위의 사원들이 힐끔 힐끔 쳐다보기 시작했고 스팀압력용기 옆에서

  다른 현장부서 사원들과 업무 협의를 하고 있던 판정과장인 강영두 과장이 도톳한 걸음으로

  정도현 대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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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는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잠시 흔들었다. 국내에서 제법 명망있고 전통있는 이회사에

  들어온지도 벌써 10년째였는데 보름 전에 있었던 현장부서 및 간접부서의 말단직 인사에서

  지금 여사원들중에서 제일 고참이고 경력도 높으며 기능도가 가장 우수한 영주가 빠지고

  다른 곳에서 전전하다가 4년전에 우째 아르바이트로 잠시 일하다가 정규사원이 된

  오십이 다 된 아줌마가 덜컥 판정검사의 반장으로 임명이 되었다는 소식에 느꼈었던

  허탈감이 다 가시지도 않았고 여러 여사원들이나 남자사원들이 볼멘소리를 부서장에게

  전달하자 기껏 한다는 얘기가 영주는 작년에 결혼을 했고 곧 아기를 가질 예정이며 아기를

  가지면 자연적으로 퇴사를 자원하므로 대상에서 뺐다는 것이었다.

 

  여자가 나이가 차서 결혼을 한 것이 무슨 죄며 또 아기를 가지고 싶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백번 양보해서 자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영주보다 한 해 늦게 입사한 정이는 또 뭐란 말인가?

 

  단 한번 사전에 의견이라도 물어봤다면 그런 섭섭함은 조금은 덜할 것이었지만 궁지에 몰려

  답변이라고 한다는 것이 오히려 더 기분을 잡치게 했다. 정이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최소한

  영주보다는 더 기분이 나쁘고 서러운 감정이 들 것이 뻔했다.

 

  사람은 기분에 따라 능률이 천차만별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속으로 삭히려 해도

  미자 아줌마의 얼굴을 볼 때마다 울컥울컥 가슴 저 편에서 솟아오르는 역한 감정은 쉬이 가라

  앉지 않았다.

 

  오늘 아침의 난리판도 그랬다. 판정을 해야 할 물량이 잠시 늦어져서 전부들 10여분동안

  이런저런 눈치를 보면서 차 한잔 하고 들어오는데 나이 지긋할 동안 아직도 끊지 못한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느라 자기들보다 한 5분 늦은 저 정도현 대리에게 저 날카롭게 생긴 반장

  아줌마가 느닷없이 가서는 시계를 들이밀면서 다음부터 자기에게 보고하고 다니라는 이야기를

  던질 때 반장으로서 정당한 업무를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갔지만 최근에 있었던 일련의 사태에서

  성격좋은 영주조차도 반장아줌마에 대한 거부감이 컸었고 또 대리라는 현장직급에서는 제법

  높은 직급의 정 도현 아저씨에게 저런 얘기를 공개석상에서 한다는 것도 못마땅했고 가만히

  듣고 있는 저 성격좋은 아저씨가 보여 준 무기력한 모습 뒤에 갑작스럽게 터진 고함소리와

  판정과장의 개입과 오고가는 고성, 삿대질에 머리가 찌끈거림을 느꼈다..

 

  이게 무슨 짓거리들인가?..주변을 잠시 둘러보니 전부들 인상이 구겨져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전기가 나가 버렸다. 웅하는 기계소리가 멈추고 취잇~!! 하고 늘 현장에서

  백그라운드 음악처럼 고음으로 깔리던 에어소리도 뚝 하고 멈춰 버렸다.

 

  이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지만 10초도 지나지 않아 원상회복되었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전기가 끊기고 에어가 나오지 않으면 판정검사를 할 수 없는데 내심 이참에

  한 시간만 정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영두 과장이 전부를 호출했다.

 

  " 에..음..음..지금 공장 전체가 정전이 되가 작업을 할 수 없으이까 마카다 휴게실에서 차

    한잔 하면서 쉬고 있으이소..전기가 다시 들어오고 에어가 정상적으로 들어오면 다시

    호출하겠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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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정전이 계속 길어지고 있었다.

   여덟 명의 판정원들이 휴게실의 둥근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별다른 화제거리도 없고 정전이

   있기 전에 오십줄 다 된 아저씨와 아줌마의 한바탕 싸움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썰렁하고

   서먹한 관계가 더욱 가라앉아 있었고 누구라도 먼저 선듯 얘기거리를 건네는 사람도 없고

   그런 분위기가 아님을 모두 밧줄 같이 옹여매듯이 나누어 쥐고 있었다.

 

   미자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서러움과 가슴의 먹먹한 통증을 가라 앉히려고 애를 쓰고

   또 썼지만 말이 그렇지 자꾸 눈가 아래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에 콧등이 시큰거려 옴을

   어쩔 수 없었다.

 

   남편도 따로 떨어져 살고 다 큰 두 아들도 얼굴을 본지 오래되었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서 필름완성제품의 흠을 수정해주는 기술을 배운지가 벌써 25년째,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은 돈 잘 버는 신랑 만나서 골프치러 다니고 가슴 수술하고

   이쁜이 수술하고 다닐 때 미자는 바늘끝 하나 쥐고 그 힘든 20여년을 버텨 왔었다.

 

   남들은 3D 업종중에서도 최악이라는 필름섬유사업중에서도 흠을 메우고 흔적을 없애는

   이 직업이야말로 거지중의 상거지 직업이라 했다. 요강 두 개 갔다 놓으면 꽉 차는 공간에서

   하루 왼종일, 어떤 때는 16시간을 일하고 집에가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고

   아침에 눈꼽 겨우 띄고 다시 일나오고, 그러다 보니 변비에 허리통증에 다리부종에 고혈압에

   픽픽 스러져가는 동료들을 본 것이 한두건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들 교육은 시켜야 했기에 미자는 그 험한 일을 말없이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제 남편은 서울 근교에서 크지는 않지만 이제 조금은 탄탄하게 사업을 일구어

   놓았고 아이들도 다 커서 큰 아이는 남편 사업을 거든다고 같이 일 하고 있고, 둘째 아이는

   대학을 다니다가 지금 군대에 있다.

 

   지난 몇 년간 남편은 계속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올라오라고 졸라댔다. 남편입장에서나 미자

   입장에서도 자기가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는 이유도 그럴만한 경제적인 빈곤도 사라진 상태인데

   굳이 이래야 하는 가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자가 지금까지의 오십 평생동안 가장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흠메워주는

   일이었다. 이 일로 가족도 다시 일으켜 세울 기반을 만들었고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쳐다보기조차

   싫었던 일이지만 막상 손에서 놓을려고 하니 너무 아쉽고 억울한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이 일 덕분에 이 큰 회사에 가로늦게 정규사원으로 입사를 했고 판정업무는 다소 미흡하지만

   검사과정에서 발견되는 흠을 메우기도 하고 검사방법이나 판정기준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우고

   지켜나가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년 전에 시작한 야간대학 공부도 사실 그니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었기에 또 이렇게 내 인생을 끝내기에는 너무도 허전하고 텁텁한 말년이 될 것 같아서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 한 달 있으면 졸업인데 사실 고민도 많이 했었다.

 

   담당교수는 정식 4년제 대학에 편입해서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유하고 있었고 미자도 이왕 시작한

   공부에 끝을 보고 싶었다. 아침 일곱시에 출근해서 오후 다섯 시에 퇴근해서 저녁먹고 황급히 달려가서

   강의를 듣고 집에 돌아오면 밤 열 한시, 과제 밀린 것 애면글면 마치고 나면 새벽 두 세시는 기본이요,

   어떤 경우는 밤을 꼬박 새우고 바로 출근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이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나니

   뿌듯한 성취감 보다는 또 다른 일과 공부에 대한 욕심이 일어났다.

 

   남편도 어느정도 기반을 잡았고 자신도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여건은 되었지만 막 그런 고민을 심각하게

   하고 있을 때 회사에서 정규사원으로 채용된지 만 4년이 겨우 되는 미자에게 반장역할을 하라고

   임명을 한 것이었다. 반장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가로 늦게 입사한 회사에서 젊고 유능한

   사원들과 직급 높은 사람이 즐비한 곳에서 유독 자기를 반장을 시키겠다는 의지에 미자는 또 다른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성실하게 보였던 모양이구나..야간 대학 다닌다고 남들 잔업하고 특근하고 할 때 가끔씩

   눈치 보면서 빠지고 했지만 회사규정에 나름대로 충실하게 임하고 업무도 할 때는 딱 부러지게 하는

   미자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이 된 모양이구나 생각을 했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원들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계속하느냐, 이제 막 인정을 받기 시작한 회사업무에

   좀 더 충실하느냐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결국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앞서서

   교수님이나 남편의 못내 아쉬운 뒷소리를 무시하고 회사에 남아있기로 어렵게 결정한 일이었다.

 

   그런데 미자가 반장이 되고 나니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주위의 시선에 시쳇말로 졸도할 뻔한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반장이 되기 전에는 제법 자주 다가와서 이런 저런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협력업체

   직원들도, 뭐 그리 알콩달콩 친하지는 않았지만 커피도 한잔씩 자유롭게 마시고 관심을

   가져주던 나이어린 여사원들도, 비교적 자유롭게 판정업무에 대해 불만도 표시하고 고맙다고 인사도

   하던 현장  부서 사람들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180도 바뀌어 버린 것은 그렇다 쳐도 뭔가 잘 해 보려고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라고 부드럽게 권유해도 반원들은 이전과는 다르게 매우 수동적으로 마지못해

   하기 싫지만 계급이 깡패니 뭐 어쩌겠나 하는 뜨악한  표정으로 매사에 미자를 대했고

 

   반장이 되기 전에는 이리 저리 둘러봐도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지금은 감시하느니,

   간섭을 하느니 하면서 같은 행동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아침의 소란스러웠던 일도 그랬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눈 빤히 뜨고 보고 있고 그렇지 않아도 현장의 부서에 비해 육체적으로는

   조금 편하다고 알려져 있는 판정부서의 특성상 시간관념은 아주 철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도현 대리는 다른 직원들이 근무에  임하고도 10분여 가까이 보이지 않다가

   매캐한 담배냄새 풀풀 풍기면서 판정검사대로 느긋하게 복귀했고

   이에 반장이 한마디 조심스럽게 한다고 한 얘기를 처음에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느닷없이 미자가 서 있는 판정대로 건너와서는 할 소리 못할 소리 가리지 않고

   따발총 퍼 붓듯이 쏟아 부었던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고 주위에 하도 보고 듣는 사람이 많아서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미자 입장에서도 참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곰 중의 곰으로 알려진 판정과장 강영두 과장은 기껏 한다는 소리가

   다른 부서사람들 보기 창피하게 이 무슨 짓들이냐 하면서 싸움을 말릴 생각은 안하고

   도리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 대었다.

 

 

   서러움에 눈시울이 달아오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전부들 휴게실에 앉아서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래도 정이가 찹쌀떡이 먹고 싶다고

   미자의 말에 대꾸라도 해 준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정전은 생각보다 오래가서 15분이 지났는데도 회복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이의 말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미자는 강영두 과장이 어디 있는가를 둘러보았지만

   이 휴게실에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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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두 과장은 깊이 들이마신 담배연기를 한숨 토하듯이 길게 내 뿜었다.

   얼어붙을 것 같은 날씨에 얼굴이 얼얼했지만 서둘러 건물안으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곰탱이다.

   아까 같은 그 자리에서 어느 누구 편을 들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아도 참 답답한 얘기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는 자조적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과장으로서 반원들의 기둥이 되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신세타령만 늘어놓았으니

   반원들은 안그래도 뾰루퉁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데 아까의 소란을 계기로 앞으로 더 아래로

   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 느낌 때문에 세 가치째 연달아 피우고 있는 담배이지만

   자꾸 담배가 더 땡겼다.

 

   정전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담배필터 끝까지 다시 깊숙이 들이마시고는 자판기 컵에 담배를 비벼 꺼고 막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쪽문에서 반장인 윤미자 아줌마가 훠이 둘러보고는 자기를 보고 도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 강 과장님, 정전이 꽤 오래 될 것 같은데 저 잠깐 외출하고 오면 안 될까요?

     오래 걸리진 않을겁니다. 20분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괜찮겠지요?“

 

 

강과장이 별 말없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미자는 총총걸음으로 주차장 방향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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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나간지 30분이 다 되어가자 휴게실에 앉아 있던 사원들 모두가 슬슬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야 오랜만에 반강제적으로 쉬게 되는 것이지만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생각이었지만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30분 가까이 지나자 매일 일을 해왔던 몸이 벌써 이상한 기미를 느꼈는지 자동적으로 안절부절 해 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반장 아줌마도 아까 물 한잔 마시고 나간지 20분이 다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강영두 과장도 전기도 없고 에어도 들어오지 않는 상태라 별 다른 제재 없이 사원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었다.

 

 

휴대폰이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는 것도 지루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상태가 서로에게 지루함을 느꼈는지 정이는 일어나서 요상한 자세의 요가흉내를 내기 시작했고 영주도 일어나서 상체를 앞으로 깊이 숙여대며 뻐덩뻐덩한 몸을 가볍게 풀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을 때 휴게실 문이 덜컥 열리면서 반장 아줌마가 종이박스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 많이들 지루했지? 정이가 떡 먹고 싶다고 해서 근처 시장에 가서 찹쌀떡 있는대로 다 사

가지고 왔거든..자 앉아서 먹자..정이는 종이컵 좀 내서 사이다 좀 따르고 밖에 정도현 대리님이랑 강영두 과장님도 좀 들어오시라고 그래요..응?“

 

 

기대하지도 않았던 반장 아줌마의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띄면서도 영주와 정이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일사불란하게 종이컵을 내고 종이박스내에 들어있는 코카콜라와 칠성사이다 페트병을 꺼냈다.

 

그리고 흰 가루에 부끄럽게 숨어있는 찹쌀떡을 보니 괜스리 기분이 좋아지면서 시장기까지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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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하루였다. 오후 다섯 시가 지나자 모두들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잔업을 하기로 예정되어있던 사원 둘을 빼면 전부들 표정도 출근할 때보다는 훨씬 펴져 있었다.

 

 

미자가 사 왔던 찹쌀떡은 비록 한 사람당 서너 개는 돌아가지 않았지만 복 많은 사람은 세 개, 운이 없었던 사람은 두 개씩 먹을 정도의 양이었고 맛도 아주 썩 괜찮은 편이었다.

 

 

찹쌀떡을 먹으면서도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그래도 반장에 임명되고도 축하 떡도 한번 못돌린 것을 갈음하는 의미에서 낸 것이라 별다른 기대도 없었다.

 

 

미자가 탈의실 문을 막 열려고 하는데 정이와 영주가 미자를 불렀다.

 

 

“ 저기..미자 아줌마..아니..반장님..아니..반장 아줌마..저..”

평소 나긋하게 말을 잘 하던 영주가 왠일인지 더듬거리며 버벅거렸다.

 

“ 왜?..무슨 할 얘기가 있는거야? ”

 

“ 저 괜찮으시면, 반장님,아니 아줌마..아이씨..미자 반장님 아줌마.."

 

"오늘 저녁에 저희들이 삼겹살에 소주 한잔 살께요..”

 

정이가 영주가 영 말을 더듬자 중간에 가로채면서 씩씩하게 들이대듯이 말을 했고 이어서

영주가 조금은 사그라드는 소리로

 

“ 정도현 대리도 오기로 했는데..괜..찮..지..요?”

 

반장이 된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아줌마..아지매 소리만 말 끝자락에 붙이던 애들이

갑자기 밙장이라는 호칭을 어색하긴 하지만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도현 대리도

저녁에 온다니..아무래도 몇 몇이서 준비를 했나 보다 라고 무덤덤하게 넘기려는데

두 아이들의 선하디 선한 눈매와 형광등 불빛에 어른하긴 하지만 머리뒤로 후광같은 것이

보였다. 반장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처음이고 같이 술한잔 하자고 먼저 제의하는 것도 처음이고..

 

미자는 가슴속에서 갑자기 평~!펑~!, 상쾌하고 찌릿하며 밤 내피처럼 덮여 있던 오랜

서러움을 산산 조각내는 박하향 가득한 폭발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갔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