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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카투사 아들과 미군친구 그리고 나의 산행기

 

 

대구지역의 미군 캠프에서 KATUSA로 근무하고 있는 큰 아이와 함께 근무하는 미군동료인 Kinney를 데리고 대구의 자랑이자 전국적으로도 잘 알려진 명산 팔공산 동봉으로 산행을 다녀왔다.아들은 대학 1년을 마치고 원없이 놀다가 카투사에 뛰어난 운빨과 그럭저럭 좀 하는 영어실력으로 합격하여 논산에서 병 기초훈련을 마치고 다시 경기도 지역에 있는 교육대대에서 입문교육을 받은 후 서울지역의 가장 큰 캠프에 배속을 받았는데 계속 이어지는 희안한 복으로 집에서 불과 15분거리에 있는 미군 캠프로 장기파견 발령을 받아서 근무하고 있다. 아들녀석과 함께 같은 방에서 근무하는 미군 일병 Kinney는 미국 메릴랜드 지역출신으로 흔히 알고 있는 우람한 덩치와 근육질의 미군이 아니라 오히려 다정다감하고 한국음식 좋아하는 순하디 순한 어린 청년으로 내년 1월이면 현재 임신중인 한국인 여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나이도 아들과 동갑인 90년생인데 미국에서 몇 개월 근무하면 주특기인 전투보병으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지역으로 배속된다고 하니 아무리 남이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 외국의 생면부지 젊은이지만 험한 곳으로 보내는 아들을 보내는 부모마음처럼 걱정이 되었다. 어제는 둘째 아이 생일이라 키니일병을 집으로 초대해서 맛있는 월남쌈을 대접하고 간단하게 술로 반주도 하면서 겸사겸사 둘째 아이 생일파티도 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는데 마침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국의 유명한 산을 다녀오고 싶다고 졸라대기도 했고 또 아들이 보기에도 사사로운 우정을 쌓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내가 데리고가마 덜컥 약속을 했다. 아침 일찍 집으로 온 두 녀석을 데리로 수태골로 향했다. 신천대로에서 연경국도를 돌아 동화사 입구를 지나 수태골 입구에서 아침식사를 하지 못한 둘을 위해 오뎅으로 가볍게 식사를 대신하고 여덟시 반 쯤 씩씩하게 출발했다. 나야 평소에 취미생활이 걷기이고 주특기가 오래 산타는 것이라 별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두 녀석은 초반에 젊음을 자신하듯 씩씩하게 치고 나갔다. 이날 키니가 걸치고 온 배낭을 보니 미군 장비가 좋은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키니일병은 3리터짜리 카멜백에 물을 가득 채워넣고 군화도 비브람창에 고어텍스와 가죽재질이다. 천조국의 군대답게 전문산악인 뺨치는

장비다. 하지만 오늘처럼 선선한 날씨에 물의 양이 너무 많고 오히려 가파른 오르막에 힘만 더 들 것 같아서 반을 비워내고 넘겨 주었다.아들녀석은 그냥 체육복 차림에 삼다수 물병 하나.^^ 수태 계곡을 지나서 수태골 주차장에서 약 1.6킬로 정도 올라가면 정감 넘치는 오두막 쉼터가 있다.수백년전이었다면 저 곳에서 나 같은 한량과 걸터 앉아서 농주나 밀주를 걸사하니 주고 받으며 고담준론을 펼쳐냈을텐데 요즘은 그런 친구들 두는  것조차 호사스러울 정도로 세태에 많이 찌들어 있다. 수태골에서 동봉까지의 거리는 3.5킬로 정도로 평소의 내 걸음으로 쉬엄쉬엄 간다해도 1시간 20분 이면 충분하지만, 나이만 젊지 산행경험이 짧은 주한미군과 KATUSA는 초반 씩씩했던 기세와는 달리 별로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들과 걸음을 맞추면서 키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참 가족관계가 복잡했다. 지금 미국에 있는 아버지는 계부이며 친형제가 셋에 배다른 형제가 셋하여 형제가 여섯이나 되고 친부는 연락은 가끔씩 하지만 오년째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도 계조부이고 외할머니는 계외조모가 되니 언듯 머리 속으로 계산이 잘 안되는 가족관계지만 참 착하게 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얼마전에도 금요일 저녁에 느닷없이 아들과 둘이서 집으로 들이닥치고 배고프다고 징징 거리는 사이 집사람이 밥을 하는데 부엌에 들어와서 서투른 한국말로 " 마마..나 아파~!!" 하길래 집사람이 아픈 녀석치고는 표정도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 Are you sick? How can I help you?"하고 영어로 물었더니 " 아니..아니..나 아파..나 become 아파~!" 하더란다. 결국 자기가 아빠가 된다는 사실을 집사람에게 자랑한다고 했던 것인데 한국군 친구엄마에게 그러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린만큼 아직 때가 덜

묻은 순수한 청년이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조금 가파른 길에 접어드니 키니가 자꾸 조심스럽게 무릎을 절뚝거리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 엄마가 자기를 가졌을 때 하루에 맥주 6캔 이상씩 마셔대어서 선천적인 무릎관절염이 있단다. 그러면서도 엄마를 원망하는 기색은 전혀 없는 것을 보니 내 기준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희안한 가족관계에 한국인의 정서로는 참 이해하기 힘든 산모의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미소를 생글생글 띠는 이 젊은 미군의 밝은 성격이 한결 친근스럽게 다가왔다. 허위허위 걸음을 재촉하니 어느새 동봉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위치한 거대한 슬랩이 나타난다.마음 같으면 그냥 한 달음에 올라치고 싶지만 장비가 전혀 없는 관계로 바라보기만 했다. 두 녀석도 재 빨리 한 일미터 정도 올라가더니 더 못가겠는지 마치 스파이더 맨처럼 슬랩에 바싹 붙어서는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사진 몇 장찍고 다시 폭포 옆길을 타고 올랐다. 폭포위에서 갈수기라서 물은 많지 않지만 아침 시간의 푸르디 푸른 하늘과 거대한 바위, 잔잔하게 들리는 물 떨어지는 소리에 두 녀석과 물도 한잔 마시고 밀감도 두어개 까먹으면서 쉬었다. 쉬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두 녀석들 사정 다 봐줬다가는 하루 종일 걸릴 것 같아서 계속 올라 갔다. 이윽고 동화사 집단시설지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면 만나게 되는 안부를 지나 가파른 돌계단 길을 치고 올라가는 제법 힘이 드는 코스에 접어들자 두 연합군이 쌕쌕거리면서 고통을 호소한다. 하지만 26년전 강원도 산악부대 출신인 나의 호령에 다시 올라간다. 두 녀석이 뒤에서 씩씩거리면서 입과 코에서 토해내는 김서리가 무척 신선하게 보인다. 문득 야간 60킬로 급속행군을 하던 그 당시 시절이 생각이 난다. 졸병 때라 눈치보느라 힘이 든다고 쉬이 표를 내기도 어려웠고 또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라 앞에 가는 고참 철모뒤의 표식판을 놓치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엎어지고 길을 잃기 십상이라 바짝 긴장을 하느라 몰랐지만 난생 처음 그런 험한 강원도 산악을 밤새도록 치고 오르고 내리고 나니 발바닥은 허옇게 부풀어 오르고 발등에는 오백원짜리 동전만한 구멍이 생겨 피고름이 나올 지경이었다. 결국 군대에서 치료를 못하고 며칠 위로휴가를 받아서 대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참 서러웠던 시절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오르자 동봉으로 가는 마지막 104 계단이 나온다. 헉헉대는 두녀석의 가련한 외침을 애써 무시한채 가파른 마지막 계단을 치고 올라와 잠시 휴식을 취하니 금새 환한 웃음을 되찾은 미군일병과 카투사 상병. 잠시 숨고르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려다 보이는 절경에 저 머얼리 가야산 자락과 대덕산 자락이 보이는데 연한 안개가 끼여서 조망이 좀 탁한 편이었지만 오히려 산수화 같은 느낌으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하늘과 비록 늦가을의마른 나무가지라도 참 이쁘다. 그리고 겨울을 보내고 나면 저 가지마다 새로운 생명의 역동넘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령재, 치산계곡 방향과 팔공산 정상부위는 겨울같은 정취가 물씬하다. 동봉 릿지로 넘어가는 길은 꽤 험하고 밧줄도 타야하고 급경사 비탈길에 조심스러운 구간이고 발끝이 찌릿찌릿한 바위 길도 많다. 팔공산은 대구지역 사람들에게는 흔하게 인식되지만 타 지역 분들에게는 참으로 가고 싶은 곳으로 손꼽히는 명산이다.갓바위로 가는 방향을 둘러보니 노적봉이 희미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비로봉 옆의 암릉과 경사지대 저 곳도 산행길이 열린다면 제법 아기자기하고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멋진 코스가 될 것이다. 동봉에서 왼쪽으로 50미터만 가면 수능기간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할머니 마애석불이 있다.옆에서 보면 꼭 길쭉하게 뽑은 모아이상 같은데 비록 정교한 조각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시골에서 소 죽 끓이다가 손주 보면 손 비벼닦고 조촘조촘 뛰어 나오시는 할머니 같이 투박하고 푸근한 모습이다. 하산 길에 남자 두 분과 여성 한 분이 자일을 늘어놓고 레펠링 연습을 하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용감하게 바위를 타는 모습을 보니 산을 좋아하는데는 굳이 나이란 것이 그다지 장애물이 되지는 않는다. 키니에게 미국에 돌아가면 꼭 전투사단으로 가야 하느냐, 가게 되면 아프가니스탄이던, 이라크던 정말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라고 저으기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다짐을 주었다. 녀석이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내 눈 빛을 보더니 감동을 먹었나 보다. 한국말로 코맙습니다 라고 머리숙여 인사를 한다.나 자신으로서는 갔다 하면 일곱 여덟시간씩 산행하던 것이 버릇이 되었을까 왕복 7킬로에 세시간 조금 넘는 산행은 땀이 잠시 나려 하다가 그냥 말라 버려 조금은 싱거운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국의 청년과 이렇게 장시간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었다.하산주는 근처 식당에서 얼큰이 짬뽕과 군만두, 그리고 소주 한병을 세 명이서 나누어 마시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두 연합군은 오랜만의 산행이 좀 힘 들었던지 오는 길 내내 차 속에서 자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금은 색다른 산행, 그러나 아무리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성장환경이 다르다 해도 가슴을 열고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의 마음은 언어와 그외의 장벽을 뛰어넘어 충분히 서로의 마음에 좋은 기억이 되고 거름으로 남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들녀석의 반년 정도 남은 군생활과 어린 미군의 인생에 오늘의 산행이 좋은 의미, 되새김으로 자리를 잡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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