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color-gray post-type-text paging-view-more">
본문 바로가기

> 마음건강

교장선생님과 아버지

 

 

참으로 오랜만에 느긋한 늦잠을 즐기고 일어난 토요일 아침,

집사람이 만들어준 향기로운 블랙커피 한잔에 지난 한주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피곤함을 담아내고 평소에는 잘 보지도 않던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이리 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할머니 세 분이 초등학교에 새로 입학하는 과정을 그린

' 그날'이란 프로그램을 급할 것도 없이 서두를 것도 없이 그냥 보고 있었는데 내용인즉,

 

어려웠던 해방전후의 격동시기에 소학교도 다니지 못해 칠순이 다 되거나 넘도록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세 분의 할머니가 어째 어째 주위의 도움으로

실제 초등학교에 일학년으로 입학하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속에서 개개인이 느끼고 경험하는 쑥스러움, 불안감, 남편의 반대,

남들의 냉소적인 시선등에 대한 극복과정과 우여곡절 끝에 입학식날 손주뻘 되는

어린아이들과 짝꿍이 되어 수업을 듣고 선생님이 내 주신

숙제를 같이 모여서 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성 드라마였다.

 

문득 학교도 다니지 못한 설움이란 대목에서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시골 저녁밥 지을 때 몽실몽실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청백색 연기처럼 떠 올랐다.

 

 

아버님은 89년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지금 내가 모시고 같이 살고 있다.

 

나의 아버님, 어머님 모두 저 할머니들처럼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하셨다.

어머님은 30년생으로 금릉군의 한 시골에서 태어나서 비록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가족들의 가르침으로 한글도 능통하고 왠만한 한자도 읽으실 수 있다.

 

아버님은 24년 그 사주 팍팍한 갑자생으로 어머님 고향보다 훨씬 더 골짜기에서

참으로 먹고 살기 어려운 집안의 셋째로 태어나 학교는 커녕 그 고향동네에서조차

드물었던 분교 근처도 못 가보신 분이었다.

 

하루에 한 끼 겨우 먹기 힘들었고 한 끼라고 해봤자 무우를 썰어넣은 헛밥에

감자 한 덩어리 텁텁하게 절반을 차지하는 밥그릇에 배도 많이 곯으셨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농사일에 뼈골이 녹아나는 힘든 성장과정을 거치셨다.

 

나이 열 살이 다되도록 글은 커녕 글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던 아버님이 어찌 어찌 동네에

들락거리는 사람들 편에 산길 이십 리를 가면 모모진사가 여는 서당이 매일

저녁 시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글을 배워보고 싶다고

할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던 모양이다.

 

묵묵히 아들의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 그라마 아침,점심 농사 다 지어놓고 가거라마, 니 알다시피 네 형들이 지금 집에 없으이

  내하고 니엄마하고 둘이서 이 힘든 농사는 못지으이 미안하지만 농사는 같이 지어야 풀칠이라도

  하고 서당비라도 좀 댈 수 안있겠나.." 하셨단다.

 

그 날 부터 아버지는 닭울음소리 긁어대는 새벽부터 열심히 지게지고 거름지고

경사 심한 비탈길에 위험스레 걸쳐있는 조그마한 밭떼기에서부터

고개를 하나 넘어야 겨우 도랑가에 얹어진 논이며 부지런히

일을 하고 점심겸 아침겸 해서 오후에나 밥 한술 떠 드시고는

 

이십리 산길을 허위허위 걸어내며 서당을 다니셨다고 한다.

왕복 사십리길, 그것도 산길에 농사일 다 지어놓고 허기만 더 채워넣는

팅팅불은 헛밥 한그릇의 힘으로 삼년을 다니셨다고 한다.

< 1930년도에 찍은 실제 훈장님과 서당의 사진이다..>

 

가끔씩 훈장님이 엿이라도 한 조각 주시면 오는내내 빨아먹고 봄철에는 산길에 널리고 널린

보리똥 열매에 산뽕나무 오디도 따먹고 산딸기를 참 많이도 드셨댄다.

 

그렇게 그렇게 삼년 서당공부 마치고 나니 문리도 트이고 세상에 대한 시야도 넓어지니

이 골짜기 산골에서 썩을 마음은 추호도 없어지고

바깥세상, 도시로 나가서 뭔가를 하고 싶으셨단다.

 

그 때 한글은 물론이고 사서삼경에 왠만한 한문고전은 다 쓰고 읽으셨다고

하니 지금 내가 생각해도 나보다는 훨씬 아버지의 배움에 대한 열망이 절절했고

머리도 나보다 더 뛰어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여동생,남동생 하나 남아있는 집안 사정을 이리저리 요리조리

아무리 봐도 아버지가 나가고 나면 허리 아픈 할아버지나 조기 치매기 가득한

할머니가 집안을 꾸려나가긴 힘들어 보여 장가들면

그 때 나가자고 마음을 다잡고는 그냥 눌러 앉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님과 결혼하시고 나이가 스무살 되니 일본군에 징집되어 기관총 사수훈련을 받고

만주지역으로 가려는 차에 광복이 되고 세상은 다시 너무나 어지러워졌다.

 

아이 둘을 낳았으나 둘 다 세살이 되기전에 무슨병인지도 모른채 세상을 떠났고

그 흔적은 지금도 호적초본을 떼면 선명하게 남아있다.

 

슬슬 도시로 나갈 채비를 하고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던 차에 육이오 동란이 터지고

다시 아버지는 스물 여섯의 나이로 국방군에 징집된다.

 

일본군 복무경험이 있어 훈련은 힘들지 않았지만 북한군의 기세에

남으로 남으로 밀리던 전황이 매우 시급하여 어영부영 아버지가 소속된 부대가

윗쪽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아버지는 가족들 걱정에

지금 말로 무단 탈영을 하게 된다.

 

당시의 행정체제가 지금보다는 덜 체계적이었을테니 헌병이 와서 다시 잡아가고 하는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문제는 인민군이 시골마을에 진주하고서부터였다.

 

당시에 학교 좀 다녔다고 하면 인민군이 좋은 시선으로 볼리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다행이 학교도 다니지 못한 프롤레탈리아 계급이었고

인민군의 명령으로 여러 가지 부역을 하게된다.

 

내 고향 지례는 당시 철수하던 미군 포병대가 인민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한 곳도 있을정도로

그 해 치열했던 전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 와중에 인민재판이라 하여 지주나 경찰가족, 좀 배웠다는 부유층에 대한 징벌이 공공연히

자행될 때 아버지는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심판하고 죽이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으로 많은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보호하셨다고 한다(아버님 고향친구들이 해 주신 얘기이다)

 

전세가 역전되어 다시 국군이 진주하고 아버지는 다시 한번 무단 탈영병에다가 인민군 부역이라는 시대가

만들어낸 억울한 사연을 안고 대구 교도소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만 기디리는 신세가 되지만 인민군 주둔 당시

아버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던 여러 지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구명활동을 한 끝에 호적에 빨간 줄만 그려진채 살아 나오셨다.

 

그렇게 생전 처음 대도시에 발을 디딘 곳이 대구 교도소였고 그런 희안한 사연으로 아버지는 대구에

가족을 데리고 나오셨다. 하지만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농사일 밖에 없는지라 이리로 저리로 품도

팔고 버려진 땅에 깻잎도 심고 배추도 심고 하면서 가족들을 건사하셨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대구 제일모직 공장 근처의 초등학교에 다닐 때

삭월세로 살던 당시 우리집에는 항상 손님들이 붐볐다.

 

그 손님들 중에 대부분은 아버지가 데리고 일하시던 아주머니들이 신세타령하러,

인생 자문받으러 오거나 이름을 지어달라는 내용들이었고 아버지의 농사사업이 좀 되기 시작하니

그렇게 모른채 하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시에 서울에서는 부추, 대구 경상도에서는 정구지라고 부르는 야채 농사를 하셨는데

제법 기틀이 잡히고 할 즈음에는 데리고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수십명이 될 정도로 대구지역에서는

규모가 제법되는 농사꾼이었다.

 

그 때 아주머니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별칭이 ' 교장 선생님 ' 이었다. 어린나이에도 아버지는

제도권 교육을 받으신 적이 없어서 학교에서 적어오라는 부모님 신상 학력이라는 칸에 항상 고민하다가

(고졸)이라고 거짓으로 적어 넣곤 했었는데 무슨 교장선생님이란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랬다. 아버지는 시골고향에서 농사지으며 늦게 배운 서당에서 단순하게 한자를 읽고 쓰고 풀이하는 과정

뿐만 아니라 그 글들이 주는 의미 교훈들을 항상 새기고 또 새기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농사일을 하면서도

늘 주위사람들에게 항상 바르고 예의를 차리면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런 차원에서 도움도 주고 조언도 주고

또 어쩌다 한번씩 종이에 글을 쓰시면 워낙 멋들어지게 한문이던 한글이던 써 내려가시는 모습을 보여주니

주위사람들이 그런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그 교장선생님이 내 아버지의 별명이란 것에 여태껏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할머니 세분의

배움을 향한 도전을 보니 참으로 아버지의 그 별명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엄하고 FM적 사고를 요구하시던 아버지였지만 남들에게는 그렇게 친절하고

통크게 인심도 쓰고 특히 종문일이라면 두발 벗고 재정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아버지였다.

 

위 사진은 89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해 의성김씨 오토제 기념관을 경북의성의 한 산자락에 준공한

사진이다. 아버지가 얼마를 후원하셨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예의바르고 남들에게 뭔가 해 주시려고 애쓰셨던 분이었고 집안(의성 김씨 종문일)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후원하고 없는 재원을 털어내시던 분이었다.

 

아버지는 그 더웠던 89년의 여름날 평소 지으시던 농사터 옆도랑에 빠진 남의 승용차를 빼내려고 힘을

쓰다가 그 차는 무사히 가고 잠시 현기증을 느끼면서 밭두렁에 앉아 계시다가 쓰러지시고는 그날 저녁

그렇게 유명을 달리 하셨다.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면 학교근처에도 못 가보신 분이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얻으셨다는 것.

아버님의 삶, 비록 질곡되고 결코 만만치 않았던 그 삶의 내면과

스스로는 철저하고 남에게는 너무나 관대했던 그 삶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투영해 낸 별명이다.

 

 

 

< 육이오 직후 호적상에 남아 있었던 그 빨간줄은 아이러니하게도 80년대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연좌제

   폐지라는 선물로 나의 인생에 조금은 햇살을 드리워주었다. >

 

 

Elvis Presley(엘비스 프레슬리)_My Way_128.mp3 [저작권위반의심, 본인만 확인가능]

<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입니다..클릭하셔서 들어보십시요..

  저는 엘비스의 노래가 훨씬 더  감성적으로 풍부한 느낌을 받습니다만..>

Elvis Presley(엘비스 프레슬리)_My Way_128.mp3
2.04MB

'> 마음건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91회 월간모던포엠 신인작가 수상작품  (0) 2011.04.16
수필가 등단  (0) 2011.03.24
습작-카투사 아들과 미군친구 그리고 나의 산행기  (0) 2011.03.06
습작-심우(心雨)  (0) 2011.03.01
습작-정전(停電)  (0) 2011.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