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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 머케니즘..(1)

인간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매순간 증명해야 한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거증할까?

 

내가 지금 보고 있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지금 밥먹고 움직이고 상대방(그것이 누가 되었던지 간에)과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다..정답은 아니지만 모법답안이라면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고민하는 나의 생각, 마음이 있기 때문에 굳이 증명, 거증할 필요가 없다..

 

내가 살아 있음을 내가 남에게 애써 보이려 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은 왜 거미와 배암을 보면 기겁을 하고 바퀴벌레에 대한 혐오감,

악어에 대한 무작위적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요즘 의학 또는 화학적인 머케니즘으로 사람의 마음을 분석하고 필요할 경우

치료의 목적으로 약물까지 사용해서 바꿔보려는 수많은 시도가 시행되고 있다.

 

위기상황이 되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기분이 좋고 즐거우면 엔돌핀이..

칭찬받고 감성적인 사람으로 바꿔주는 세로토닌이 그런 현상들을 설명하는

용어고 자주 쓰이는 것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똑 같은 상황에서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응하는 반면

어떤 이는 불 같이 화를 내고 집어던지고 주체를 못할 정도로 흥분하는가?

 

왜 현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이나 기수련, 요가등과 같은 정신과 몸을 같이 아우르는

운동수련을 과거에 비해 많이 찾게 되는 것일까?

 

전설에나 나옴직한 고대의 고승들의 장좌불와, 추위에서의 견딤, 외로움과의 싸움을 통한

득도와 깨달음에 대한 정진이 그토록 고귀하게 느껴질까?

 

현대 심리학에서는 분리, 분석, 화학적, 추론적 접근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 생각을 정리해 오고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와 칼융으로 대변되는 오이디푸스나 일렉트라 컴플렉스가 진정 인간이 가지는

저 기저의  마음자리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한 것일까?

 

노자나 공자, 한비자가 순자, 맹자가 그토록 펼치고자 했던 유교적 윤리사상에는 과연 인간의 근원적

본능을 얼마나 투영하고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고타마 붓다가 그 화려한 왕자의 생활을 버리고 굶주림과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진정 그는

사람, 인간의 근원적 마음자리에 대한 고찰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현상적 깨달음만

이루어 냈던 것일까?

 

나사렛 예수는 진정 하느님의 아들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 왔으며 그는 우리들에게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기도하고 하느님과 자신을 찾는 것외에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가?

종교나 그와 유사한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옆에 있으면 편안하고 낯선 사람과 같이 있으면 왜 이리 불안해 지는 것일까?

 

내 아이가 식당에서 마구 뛰어노는 것은 봐 줄만 한데 왜 다른 모르는 사람의 아이가 고함이라도 치면

왜 그리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돋을까?

 

내가 술을 마시면 그에 맞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 비록 길거리에 토악질을 하고 아무 곳에나 방뇨를 해도

내 스스로 합당한 용서가 되지만 젊거나 나이가 들거나 누구가 되었던지 다른 모르는 사람이 그러면

어찌 그리 추하게 보이는 것일까?

 

왜 우리는 끝나고 나면 별스럽지도 않은 각종 스포츠에서 특히 일본이라는 나라와 축구던, 야구던, 권투던

그토록 목을 매고 관전하고 열광하고 지기라도 하면 감독이 무능하니..저 선수가 병신이니 하면서 개거품을 무는 것일까?

 

이 모든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유는 살아 생전에, 아니 죽어서도 뚜렷하게 알아내기 어려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사람만이 가지는, 또 일부 동물도 가지고 있으리라 추측되는 그 마음이라는 것..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길래 희노애락,탐진치의 용어에 가득 담겨 넘쳐 흐르고

그토록 수 많은 고승대덕들과 현인들이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신비로운 불경의 이름으로

심리학이니 하면서 고상한 정식 학문으로 채택되어 수십 억 인구와 수천년의 인류 문화사에

자랑스럽게 최고의 화두로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사흘 밤 낮, 아니 평생을 다 바쳐서

그 하나의 명제에 집중하더라도 아직 명쾌한 답을 내려 놓고 있지 못하다.

 

사람들은 늘상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피부에 와 닿은 느낌적 현상으로 정보를 획득하고 그 정보에 맞는 대뇌와 소뇌의

지시작용에 의해 반응한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당연히 있다..

 

사람의 마음작용을 크게 나누어 보면

하나가 의식적 작용, 즉 눈과 귀, 손과 발, 그리고 피부 전체에 와 닿은 느낌에 의해 정상적인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이요..

 

또 하나가 의식이라는 테두리 저 안쪽에 자리잡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미리 입력된 반응머케니즘처럼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작용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어쩌면 인생의 전부 다가 의식적 작용에 의해 좌우되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고

일부 고승들이나 수행자들만이 그 막막한 무의식의 자리에서 현상을 풀고 이해하려는 구도자적인

삶을 살고 있다.

 

고대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주 믿음사상이었는데 그들의 규율, 특히 외진 산골 또는 벼랑 끝에 지어진

수도원에서 사는 수도승들의 삶은 현대의 종교인들과 사뭇 다르다.

 

거의 인간의 한계에 다다르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당연한 일상사처럼 체험하고 엄격한 규율과 제약 속에서

강제적인 구속의 삶을 살면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최소한의 음식으로 몸만 유지하면서

진리와 절대자의 마음을 읽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했으며

 

티벳의 수도승들은 윤회와 만트라라는 두 가지 화두를 잡고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 가끔은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적 환경 속에서 해 맑은 미소를 띄면서 수도하고 있다.

우리 한국에서도 많은 뜻 깊은 스님들이 동안거, 하안거를 실시하고 속세와의 연을 끊고 깊은 산 속 암자에서 외로움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석가모니가 남기신 그 흔적을 따라 하고 불경을 읽고 외며 채식을 하면서 깨달음을 위한 고행을 마다 하지 않는다.

 

일부 고도의 수련단계를 이수한 선도수련가들도 호흡과 주천을 통해 인간의 근원과 마음자리 그 것을 부여잡고 털어내기 위해

동굴 속에서 허름한 움막에서 간신히 몸을 연명할 최소한의 섭식만으로 그렇게 밤 낮 없이 몸을 던져 수행하고 있다.

 

한편 최첨단 분석기법과 이론적 체계하에서 전세계의 철학, 인문학자, 심리학자들은 표본조사와 실험과 검증이라는 단순한 과정을 통해

인간이 영위하고자 하는 욕심과 그 반응 머케니즘, 그리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새로운 이론과 법칙을 만들기 위해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실험결과에 오류는 없는지 살피고 또 살핀다.

 

과거 현재를 통틀어 우리는 수 많은 성현들과 선각들의 전기와 그들이 남긴 주옥같은 명언들을 통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풀리지 않는 어려움에 몸서리를 치기도 하고 밤새워 그 흔적들을 쪼개보고

살펴보고 내 것으로 대입시켜도 보는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아직도 쉽게 만인들에게 적용시켜도 될

대통일적 마음에 대한 논리를 풀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마음의 작용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의식, 무의식의 구분으로 나눌 수 있지만 먼저 의식적 작용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 하나가 모든 일, 현상이 나와 직접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기준의 설정이요.

그 하나가 그 기준에서 분류된 것 들이 나에게 해가 되는가 이익이 되는 가 하는 판단의 설정이요.

그 하나가 해와 이득의 강도와 크기는 얼마나 되는가 하는 스케일의 구분이다.

 

이 세가지 단계를 순식간에 결정하는 대뇌의 판단이 우선 의식적 세계에서의 마음의 작용인데.

예를 들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주변에 대형 쇼핑센터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하면

- 일단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 나에게 이익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금전적)

- 그러면 아파트 가격이 지금보다 20%는 더 오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진다. 그 반대의 논리도 충분히 성립한다..

 

하지만 위의 경우는 당장의 기분을 흥분시키고 다운시키는 미시적 단계의 강도는 매우 약한 편이다.

 

 

또 하나 일상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면,

 

내가 식당에 가서 맛있는 아구 찜을 사 먹었다.

그 아구 찜이 알고 보니 아구가 아니라 잡어였다.

나는 아구찜으로 오만원을 썼는데 잡어의 실제가치는 오천원 밖에 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지금 매우 화가 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 가짜 아구찜을 먹고 식중독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멀쩡하다.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불행한 사람인가?

 

또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면,

지금 가을이지만 여름 못지 않은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

바로 위의 사진처럼 흰 눈이 펄펄 내리는 전경을 본다면

우리는 보통 어떤 생각을 할까..아니 어떤 마음이 들까?

 

대부분 시원하다...겨울이 좋네..차라리 저렇게 눈이라도 왔으면..

이런 마음들,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차를 몰고 수백 킬로 떨어진 곳으로 급히 가야 한다면

창 밖의 저 광경에 아이 좋아라~! 할 사람은 백이면 백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떤 현상을 나의 기준, 이해의 유무, 그 스케일의 크기에 따라 순식간에

우리는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하며 짜증을 내거나 기뻐서 펄쩍 뛰는 것이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극에 사상 최악의 눈보라가 몰아쳤다는 소식에

우리는 별다른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결국 내가 표면적으로 나타내는 마음..행복과 불행의 기준에 따른 마음의 반응은 분명

나와의 연관성에서 출발해서 그 연관성의 깊이와 강도에서 결정되기 마련이다..

 

위의 사진에서 나무가 바위를 받치고 있는 것일까..바위가 나무를 누르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여 보면 저 나무와 바위는 별개의 삶을 살고 있다..

 

물론 나무의 뿌리가 바위를 쪼개고 들어간 것이지만 이는 무의식의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니,

2편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내가 이 마음..그 머케니즘을 몇 편에 나누어 쓸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평소에 생각해 오던 마음 다스리기, 피안의 세계와 도, 깨달음에 대한 것을

글로 풀어서 상세하게 써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스스로 만족할 때 까지 계속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계속 써 나가 보려고 한다..

 

 

 

 

 

 

마음을 안다는 것..그리고 그것의 작용원리를 안다는 것..

그래서 비록 불완전하지만 이 글을 읽는 몇 몇 사람들이 조금은 덜 화를 내고

이 세상의 구성원리와 폭 넓은 우주적 차원의 세계에서 광대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할 수 있다면..

 

어쩌면 나만의 착각, 혼자만의 정신세계에서 나 혼자 하는 독백으로 끝날지는 모르겠으나

한번쯤 깊이 사색하고 풀어 써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는 있겠지..

(2)편에서 계속.. - 언제가 될지는 모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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