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한국시리즈 2차전 하이라이트를 보다가
문득 롯데 자이언츠의 영원한 대명사인
故 최 동 원 선수가 생각이 났다.
위기에 몰린 두산의 침울한 분위기를
완전히 돌려놓은 두산의 외국인 투수
니퍼트 선수의 활약이 비단 어제 2차전뿐만 아니라
플레이오프전에서도 강적 NC를 제칠 수 있었던
절대 에이스의 역할과 그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는 순간
몇 년 전 대장암으로 투병하다 작고한
최 동 원 선수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김 시 진 선수와의 평생 라이벌,
선 동 열 선수와의 불꽃 승부,
고등학교 시절부터 최고투수의 대열에서
국내외 각종 대회에서 맹활약을 했고 마치
어깨에 고래 힘줄이라도 단 듯이
마치 스스로 태워 없애려고 악으로 깡으로
이겨낸 소름끼치는 연투능력으로
세간의 예측을 뒤집고
롯데의 1984년 우승을 일구어 냈던 선수.
그럼에도 따뜻한 동료의식으로
선수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스스로의 불이익도 감내했던 그 선수.
그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열정이 무색하게
그는 몇 년 전 투병생활 끝에 다른 세상으로 영면의 길을 떠났다.
비슷한 시기에
투수엔 최 동 원,
타자에는 장 효 조.
그 두 사람이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세상을 등졌는데 그 둘의 맞대결 기록 또한 매우 흥미롭다.
장 효 조 하면 타격왕, 출루의 황제라는 별명이 있는데
최 동 원 선수를 상대로 통산타율이 3할이 넘는 당시의 타자가 유일했다.
탈삼진에 관한한 최고의 투수가 삼진을 당하는 비율이
8푼밖에 되지 않는 타자를
한게임에서 네 번 연속 삼진으로 아웃시킨 기록도
이 두 선수간의 흥미로운 기록이다.
갑작스럽게 야구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작고하신 이 두 불세출의 야구 영웅들의
사주 구성이 많은 것을 시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랫배 힘을 많이 쓰는 차력사들이나
순간적인 힘을 쏟아내는 선수나 사람일수록
대개의 경우 그 생명이 짧다.
그 삶의 질을 생각하면
짧고 굵게라는 수식어로 어느 정도 넘어갈 수 있겠지만
실제로 사주에서의 구성과 완전하게 다르게 질병이나
사고, 뜻하지 않는 재해로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뜻밖에도 많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젊음을 불태우는 열정과 그 열정에 이어지는 영광도 좋지만
그 이후를 잘 관리하지 않으면 온 힘을 쏟고 난 뒤에
허탈함, 탈진으로 인해 명을 단축하기 쉽다는 얘기를 드리고 싶다.
물론 여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변수들이
종합적이고도 복잡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꼭 그렇다고 확신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최 동 원 선수와 장 효 조 선수가
맹활약할 당시에 야구를 좋아했던
우리 50대 세대들은 참으로 행복한
야구관련 추억과 시간을 누렸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정말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그 두 분의 집념과 열정 덕분에 우리세대는
아주 행복한 야구계의 두 큰 별들이 주는
기쁨을 맛보고 즐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수로 치면
김 광 석,
최 헌,
김 정 호 등의 존재로 인해 감성이 풍부하고
가을비 우산 속이면 괜히 흥얼거리는
노래 가락 하나가 늘어났던 것이다.
어째 이야기가 잠시 어긋났지만
오늘 할 이야기는 우주구성에 있어서
인류원리와 사주명리의 절묘한 공통점에 관한 것이다.
먼저 가볍게 머리를 푸는 의미에서
아래 경우에 바라보는 나와 존재하는 나,
그리고 우주 저 편에
또 다른 나의 의식이 있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실제 있었다는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 조종사가
날아가는 기관총탄을 보고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조종사가 모는 전투기의 속도와
진행방향으로 날아오던 총탄의 속도가
거의 일치하면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듣고서도 설마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대기권에서 우주인들이 하는 무중력 실험은
거대한 수송기가 최고로 고도를 올렸다가
갑자기 특정각도로 내리꽂히는 하강을 하게 되면
일종의 중력 작용이 무력화 되는 잠깐의 시간이 생기는데
여기서 대기권 밖으로 나가는 우주인들이
무중력 적응훈련을 한단다.
실제 동영상도 많이 돌고 있는데
이 또한 중력이 당기는 힘과
중력이 당기는 힘의 순방향으로
나아가는 속도와 각도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무중력이다.
어느 학자가 고액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대가로
남극에서 북극곰의 생태와 거주밀도 등을 조사 받았고,
다른 학자는 북극에서 펭귄의 거주밀도와 이동경로 등을
조사할 것을 의뢰받았다.
그리고 또 한 예는 우주전체를 전
파 망원경으로 조사하면서
인간과 같은 고등생명체는 그렇다 쳐도
하등 생물체가 살 수 있는 지역
즉,
Goldilocks Planet을 조사한다고 치자.
단,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서이다.
마지막 예는 우리가 화성을 제 2의 거주행성으로 삼고
이에 대한 준비를 하는데
화성의 조건에 맞는 생물체의 필요조건을
무작위로 조사한다고 치자.
예를 들어
원숭이,
바퀴벌레,
곰 벌레,
물벼룩,
호랑이,
사자,
임팔라,
코끼리 등등.
위에서 간략하게 드는 예는 사실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떤 미세한 조정을 하지 않으면 전혀 턱도 없는
잠정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하다.
다시 말해 완전 엉터리 결론을 내리기 쉽다는 것이다.
첫 번 경우에서는 조종사가 자신의 전투기가 내고 있는
속도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총탄은 거의 멈추어 있는 상태이거나
조종사의 판단과 육체적인 능력으로 잡아낼 수 있을 정도의
미미한 속도로만 움직이는 것이 된다.
즉, 무스탕 전투기의 예를 들면 거의 최고속도가
시속 640킬로 정도 되니까
자신이 잡을 수 있었던 총탄의 속도도 사실은
거의 유사한 정도이지만
자신의 전투기가 내고 있는 속도를 무시한다면
총탄의 속도는 겨우 10킬로 내외가 된다.
만약 옆으로 날아가면서 잡는다면 말이다.
내가 가진 물리적인 힘,
이동속도, 중량, 밀도 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관측되는 결과만 가지고 결론을 내면 이런 식의
허황된 결론이 얼마든지 유도될 수 있다.
이는 무중력 실험을 하는 예비우주인들의 경우도 같다.
자신을 싣고 고속으로 내리 꽂히는 비행기의 속도와 각도가
만들어 내는 인위적인 무중력임을 모르고
그냥 그 상태만을 보고 훈련한다면
내가 사는 세상이나 공간 모두가
중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는 얘기이다.
물론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모르는 세상, 우주, 물리학적 법칙이
완전히 다른 우주에서는
분명 우리로서는 상상하거나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연역법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마디로 내가 아는 것이 모든 것이 아니듯이
우리 인류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이
절대 진리에는 한참 모자라거나
절대 진리를 구성하고 있는 한 단면이나 단편만을 보고
속단하고 연구하고 노벨상을 타가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의구심이 든다.
세 번, 네 번째 경우는
잘못된 조건하에서의 실험은 위의 예와 마찬가지로
전혀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야 말 것이다.
남극에 북극곰이 애시 당초 존재하지 않는데
아무리 비싼 돈을 들이고 장비들 투입해서 조사를 한들
존재하지 않는 북극곰이 남극에 있을 리가 만무하고 고
로 남극에는 북극곰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추가 조사는 없는 것으로 연구를 마감하고 만다.
이를 다시 해석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나 우주에는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그 어떤 생명체가
다른 물리학적 법칙이 적용되는 우주나
세상이 분명하게 존재함에도
연구의 조건이나 가정에서 어긋난 시작을 하면
아무리 조사연구해도 결론은 뻔하다.
화성에서의 생존조건에
가장 적합한 지구상의 생물은
바퀴벌레가 될 수도 있고
물벼룩이 될 수도 있으나
현재 우리의 기술로는
그러한 하등생물의 신체조건을
우리 인간의 몸에 적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겨우 한다는 것이 방사능 차폐기능,
산소 공급기능과 외부의 극단적 온도변화조건에서도
견디어 낼 수 있는 거주시설이나 우주복을 공급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화성까지 우주인이나 생존에 필요한 물자들을
이상 없이 수송해가는 우주선을 만드는 기술은
확보되어 있다는 전제조건이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의미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고 관측하고 있는
지금 당장의 이 우주가 앞선 글에서 다루었듯이
너무나 절묘한
미세조정(마이너스 123승이라는 절망적 확률의 양의 우주상수로만이 지금의 우주가 존재한다)을
통해서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기적적이며 절묘하다 못해
절대적 창조적 힘을 가진 그 어떤 존재의 가능성을 접고는
달리 뚜렷하게 말할 근거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거의 음의 무한대적 확률의 가능성이 실현되어 있는
이 우주를 바라보고 관측하며 상수가 어쩌니
사주명리가 어쩌니 정치가 어떻고
민족의식, 선민사상, 테러, 기상악화,
종교와 이념적 갈등, 빈부의 격차로 인한 서민들의 생활고 가중 등등
갖가지 문제를 뒤집어쓰고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존재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너무나 위대하고 귀중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인류가 없는 우주는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내가 없는 이 세상은 내게 어떤 귀중한 의미를 주는 것일까?
기껏해야 100년의 삶도 살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나의 우주와 세상은
그 어느 누구(그것이 부모가 되었던 남편, 부인이 되었던, 자식이 되었던 친한 친구가 되었던)의 것보다
소중하고 귀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인류 중심적 사고에서 조금만 더 영역을 확대해 보면
그래서 사고의 폭을 조금만 확장해 보면
우리는 어떻게 하다 보니 마이너스 123승의 우주상수를 가진
우주에서 살고 있을 뿐이고
다른 우주상수를 가진
수없이 많은 다중우주가 존재한다고 보면
절대적인 의문?
왜 우리만 이 우주를 보고 있는가 하는
근원적 궁극적 의문이 해답이 너무나 쉽게 나온다.
조금 인문학적 관점에서 돌려 보면
우리 인류가 잘 나서 우리 인류를 위한 우주가 태어난 것이
아니고 우리 인류가 살만한 우주
(협의로는 우리 은하계와 태양계, 그리고 지구 그리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극지나 고산지역을 제외한 장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우주도 있을 수 있고
우리인류보다 훨씬 더 생체밀도가
높거나 낮은 생물체가 곳곳에 살고 있는
여러 우주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믿는 편이
Only Why 라는 난제에 대한 근원적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이언 톨로지 개념을 만들어내고
이를 숭배하는 종교적 단체로까지 성장하게 한
론 허버드의 장편소설 Battle field on Earth에 보면
지구인보다 훨씬 더 신체밀도가 높고 신체는 더 크며
지구인들에게는 독가스에 해당하는 기체를 흡입하는
사이클로 종족이 텔레포테이션 기술로
지구를 침략하고 독가스로
전 세계 모든 인구를 절멸시킨 후
약 1천년이 지난 시점에서
거의 원시인처럼 살아가는 남은 지구인들의 대 반전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문명과 이질적인 생존요소를
가지고 살아가는 외계인들이 등장한다.
인류원리란 인간의 관점에서 우주논리를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인류원리를 조금 더 깊이 넓게 확장하면
또 다시 다중우주라는 개념을 접하지 않을 수 없고 다
중우주는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현재 물리학, 천체우주물리학에서 제기되고 있는
각종 난제를 너무나 쉽게 해결해 버리고 있다.
왜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가 1억 5천만 킬로미터인가? 라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해 줄 과학자가 과연 존재하겠는가?
하지만 인류원리와 미세조정의 원리로 보면 그 이유는
그런 태양계에 지구가 마침 그 자리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우리 인류가 지구에서 살고 있다고 통변하며,
실제 관측 결과에 따르면
그렇지 못한 항성계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Goldilocks zone에 해당하는 행성을 찾아내고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가질 것으로 추측하는 것 또한
이 인류원리에 기초한 것이지만 만
약 산소와 질소가 아닌
유황과 비소를 생존의 기체로 삼는
어떤 생물체가 있다면
이 Goldilocks zone은 그들에게는 생물체가 살 수 없는
zone으로 치부될 것이다.
론 허버드의 사이클로 종족처럼 말이다.
자, 이 개념을 정확하게 그대로 옮겨서
사주명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운명은 왜 제 각각인가?
하는 논제에 대입시켜 보자.
흔히들 자주 듣는 푸념 중의 하나가
‘ 왜 내 팔자가 이런가? 다른 놈들은 그럭저럭
다 잘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토록 힘드냐?’ 일 것이다.
왜 그런가는 내가 그런 팔자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며
잘 살고 행복하게 사는 다른 사람들은
그런 팔자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단
순하게 답을 던져 버리면 문제는 쉽게 풀리는데
뭔가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고
왠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든다.
왜 저 놈, 저 년은 나보다도 못 생기고
학벌도 낮고 집안도 별로인데
지금 저렇게 잘 나가는가?
아마도 특정분야에서 나와는
다른 인간상수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며
주변 환경이 마침 적절하게 도와주고 스스로도
그런 방향에 대한 감을 잡고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
억울하고 안타깝지만 인정 할 것은 인정하자.
그러나 사주명리의 근본 개념은
내가 왜 그렇게 안 좋은 팔자를 가지고 태어났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비록 이런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이를 제대로 알고 극복하고 개선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본인의 역량과 운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내가 상처할 팔자를 강하게 가지고 태어났다면
이에 맞는 배우자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미리 방지할 수 있고,
내가 돈 복이 아예 없는 사주라면
돈을 쫓아가지 말고 내가 잘하는 분야,
적성에 맞는 분야에서 월급쟁이라도 하면서
성실하게 살면 돈이나 재물로 인한
흉, 비극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꾼인 조 희 팔 사건을 두고 말들이 많다.
이 놈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고 마음고생을 하시는 많은 피해자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이야기지만
그들도 돈에 대해 노력에 비해 과한 보상이나
이익을 찾아 다녔다는 원죄는 있다.
돈이란 것이 결코 쉽게 들어오지 않으며
노력과 땀을 동반하지 않은 돈의 위험성은
곧 나의 기운을 빼가고 잘못하면
관성을 부추겨 나를 강력하게 치는
악성역할을 한다는 사주명리의
기본원칙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그런 허망한 경우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복권을 사고 로또를 사는 것은
그나마 서민들에게 일확천금의
돈 복이 매우 희박한 확률로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이 되고
또 여유 돈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에
그다지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정선에 있는 강원랜드에서
몇 년간 수백억의 돈을 잃고 소송을 하고,
마카오에 있는 카지노에 조직폭력배의
유혹으로 급전을 당겨쓰고 집 날아가고
알거지 신세로 거리에 내쫓기는 경우를
너무나 흔하게 보고 있다.
우리는 욕심이라는 것을 제어할 수 있는
이성이 있고 내 그릇에 과하게 담기면
그릇이 뒤집어 지는 평범한 진리를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너무 쉽게 빠르게 결과를 보려는
조급함에 우리 스스로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얘기가 나온 김에 잠깐 한 사례를 언급하고자 한다.
국내 사주 사이트에서
연간 매출액이 50억을 훨씬 넘는 유명 사이트가 있다.
이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남 녀 간의 결혼 길일을 봐주는 기능이 있는데
물론 일정금액의 돈을 지불해야 볼 수 있다.
이 사이트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생년월일시를 입력하면
프로그램에 의해서 불과 몇 초 만에
가장 좋은 길일을 선택해준다.
한 실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남자의 사주구성은
己未 年
乙亥 月
丙申 日
辛卯 時 생이고
여자는
辛酉 年
庚子 月
乙丑 日
乙酉 時 생이다.
남자의 경우를 보면
지지구성이 亥卯未 三合 木局 즉, 印綬局이 되고
전체 오행구성에서 木이 4개나 되어 매우 많다.
이런 경우에는 木기운을 빼든지
制하는 火나 金기운이 절대 喜神작용을 하는데
이 사이트에서 추천하는 결혼 길일은
엉뚱하다 못해 기가 막히는 甲寅일을 점수까지
무려 115점을 주면서 최대의 길일로 추천하고 있다.
어안이 벙벙하다.
이러고도 국내 최고의 역술 사이트로서
결제대금을 챙기고 있다니.
무슨 얘기냐 하면
안 그래도 木이 과중한 남자의 사주에
갑도 목이요, 인도 목인데
그것도 透干이 되어 너무나 木 기운이 강력한 날짜가
두 사람에게 최고로 좋은 길일 이라고 추천하고 있으니
무지해도 이렇게 무지할 수가 없다.
물론 이 길일을 구동하는 프로그램은
천의 황도, 오합, 해일, 흑도, 생기, 복덕 등의
길흉 표를 참조하여 반영한 것인데 일
반론 적으로 100% 부정하기는 힘들지만
수없이 많은 개개인들의 사주에 도움이 되는
희신, 기신의 작용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일괄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의 단계를 넘어서는 촌극이다.
거기에 더 가관인 것은
남자의 일지와 길일의 지지가 서로
寅申 冲을 이루고 있는데
가장 근본이 되는 사항을 아예 깡그리
무시한 길일 선택이다.
일지의 충은 곧 배우자와의
갈등, 이혼, 사별, 다툼, 구설 등의 작용력이 있는 것인데
궁합은 차지하고라도 이런 날을 길일도 선택해주고도 버젓이
돈을 받는다는 것이
같은 역학을 공부하면서 짜증도 이런 왕 짜증이 없다.
여자에게도 木이 충분히 있는 사실은 접어두고서라도 말이다.
사주명리의 원리로 보면
나 자신이나 상대방의 사주에 모자라고
길 작용을 하며 吉神, 吉星 등이 풍부하게 짜여 진 일이
바로 최고의 길일이다.
청허도 가끔씩 의뢰를 받으면
최고의 길일을 선택하는데 일이 바쁜 탓도 있지만
보통 이틀 내지 사흘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두 사람이나 해당 의뢰인의 사주를 감정하고 분석하여
의뢰인의 당시 조건에 가장 적합하고 오행이나 사주구성에
도움이 되는 날을 선택한다.
그리고 다시 검증을 하고
재차 확인을 하고는 답을 주는데
위에서 언급한 이런 날치기 사이트가
떼돈을 버는 이유는
그저 빠르게 확인할 수 있고
역학적으로 너무 모르는 상태에서 찾아 들어가기 때문이다.
안타깝고 아쉽지만 이 또한
그 사람들의 조급함이 부른 촌극이니
누구 하나를 잡아서 족쳐 될 일이 아님도 잘 알고 있다.
바라건대 이런 싸구려 사이트에서
나온 정보를 가지고 그대로 길일로 잡고 시행하는
제 2차의 치명적 오류를 저지르지 않기를.
이름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이트도 부지기수이다.
셀프 작명이라고 해서 해당 사람의
사주분석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만들어 내는
조립식 작명이 대세처럼 여겨지고
또 어떻게 홍보를 했는지
관련 블로그나 카페에는 이런 사이트에 대한 찬양일색이다.
아연실색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지경이지만
현실이 이러니
정도를 걷고 원리와 이론에 충실한 많은
역학 전문가들이 도매금으로
사이비, 점쟁이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새긴 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한 역술, 역학의 요지경이다.
어쨌든 우주상수의 가능한 개수는 거의 무한대요,
우리 인간들의 개별적인 인간상수도 천차만별이다.
왜 지금 이런 세상이요, 우주인가를 궁금해 하기 이전에
무량수처럼 많은 경우 수에
우리 인간과 우주가 각각의 구성 원리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
그것이 이번 글에서 청허가 웅변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이다.
가끔씩 선도나 단전호흡 수련이 나름 깊다고 자부하시는 분들이
이런 질문들을 해 오신다.
“ 청허 샘, 우리가 이런 수련을 해 온지
수십 년인데 아직도 영혼이 있는지,
없는가에 대해서는 감을 잡을 수가 없어요.
통쾌하게 답변 좀 해주소.
나는 아무리 명경지수의 경지에 들어도 그 답을 종잡을 수가 없어요.”
사실 우리 인류가 가장 궁금해 하고
속으로는 존재한다고 믿고 싶은 사실중의 하나가
죽음 이후의 세계,
그리고 영혼의 존재 유무일 것이다.
또한 너무나 종교적으로
이념적으로 철학적으로
중요하고도 인류의 삶과 문명의 발달과 쇠퇴,
진화와 진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항이라서
섣불리 개인적인 생각만으로
답을 해주기 어려운 내용이다.
불교에서도, 기독교나 천주교에서도
심지어 수많은 민중종교나 토테미즘,
샤머니즘에서도 그 종교사상의 근본 축이
바로 영혼과 사후세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고,
수없이 많은 NDE(Near Death Experience, 의사체험) 사례를 보면 없다고
딱 잘라 부정하기가 심적으로 힘든 것이 사실이다.
청허의 개인적인 생각을 전제로 말씀드리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윤회의 개념에서 보면
우리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종 분자들이 대기나 물질의
순환원리에 의해 다시 이 세계에서 돌고 도는 것은 인정하고
사실 과학적 근거도 충분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과 가슴에서 얘기하는
솔직한 바람은 다른 것이다.
청허도 영혼이 영생하고
윤회하고 죄를 지으면 사후세계에서 대가를 달게 받고
복을 지으면 천국이나 극락에서 행복하게 이후의
삶을 영위한다고 믿고 싶은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사주명리에 통달하면 전생의 삶과 후생의 삶까지도
파악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그분들의 생각을 존중한다.
그러나 확인 불가능한 사실을 가지고
맞다! 라고 맞장구를 치기는 매우 불편하다.
정확한 현재의 상태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몇 몇 유명대학교 의과대학과 심리학과 교수 연구진들이
의사체험의 진실성 여부를 실험하기 위해 막대한
경비를 들여서 죽음 직전에 있는 환자들의
천장에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문양이
그려진 카드를 병실에서는 볼 수 없지만
천장에 붙어서 보면 보이는 위치에 두고
실제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나왔을 때
그리고 다시 의사체험을 한 후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 카드의 문양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아맞힐 수 있는가에 대한
객관적 실험(물론 실험조건이 완전하게 객관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을
진행하는 것인데
현재시점에서는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http://theness.com/neurologicablog/index.php/aware-results-finally-published-no-evidence-of-nde/
사실 냉정하게 살펴보면 이런 실험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실험개시 이전의 많은
전문단체(뇌신경관련)의 주의나 경고가 있었지만
우리 인류의 궁극적 의문사항에 대한 간절한
욕구를 이겨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잠정적이긴 하지만
어떤 계측이나 관찰 도구를 활용하여
영혼의 존재유무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객관적 자료의 검증은 실패로 끝날 확률이 매우 높다.
우리 인간들은 왜 이렇게 종교적, 철학적,
윤리적 개념을 포괄하여 사후세계가 있으며
우리 인간의 영혼이 단순한
육체적 물리화학적 소멸의 단계를 거침에도
살아서 날아오르고
저편 피안의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누린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개인적인 생각임을 전제로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욕심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
그래서 아무리 옆에서 매일 매일 누군가 죽어나가도
죽음이라는 자체에 대한 현상이 나에게 일어난다는
절대적 현실감각을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신비한 세상을 다루는 많은 사이트에서는
영혼의 불멸을 절대명제로 삼고 많은 경전과
훌륭한 전도사, 포교사의 말과 설득으로
신도들을 끌어 모으지만
물질적 분자구조에서의 순환 말고는
영혼의 구성 물질이 무엇인지,
어떤 힘으로 영혼들이 살아가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검증된 자료로서
거증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21그램이라는 영화는
실제 사람이 죽는 순간의 중량변화를 측정한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지만 21그램이면
분명 중력의 영향을 받아야 하고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우주의 물리학적 법칙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21그램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게 하려면
무엇인가 추진력이나 반발력을 주거나
자체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스스로 가지고 있다면
그 힘을 내기 위한 에너지원은 무엇일까?
행여나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 영혼이 가지는 힘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적 세계에서는 얼마나 큰 힘이 소요되어야 할까?
지구라는 작은 행성의 중력을 견디어 내고
대기권을 벗어나기 위해 무려 수천만 파운드의 추진력이 필요한 세상이다.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분명하다고 확인된 사실만 놓고 보면
우리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각종 화학적 신경전달신호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청허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 잠시
뜸을 들였다가
없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 제 가슴에서 중단전이
울리는 힘이 된다고 답변을 하곤 한다.
이 문제는 논쟁의 항목이 될 수 없으며
가슴과 현실의 사이에서
영원히 죽을 때까지 청허가 안고 가야 할,
어쩌면 대다수 인류들도 마찬가지로,
미제의 궁금 사항으로 남겨두고 싶다.
'> 마음건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허의 명리학 이야기23편-중력파 단상 (0) | 2016.03.04 |
---|---|
사주명리학 이야기(22편_간절함과 사주의 경우수) (0) | 2016.02.26 |
사주 명리학 이야기(20편)_돈 복이란 것의 정체 (0) | 2015.10.16 |
사주 명리학 이야기(19편) (0) | 2015.10.07 |
사주명리학 이야기(18편, 속궁합) (0) | 2015.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