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래전에 퇴직하신 제일모직의 역사이자, 중흥의 한 중앙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다 하셨던 대선배님 몇 분이서 회사를 찾았다.
다들 서울에서 거주하시는데 대구에 단체 모임차 내려가시는 길에
그래도 몸 담았던 제일모직의 직물의 후배들을 보고 싶고
화려했던 그 옛날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을
다 바쳐서 인생의 전부이다시피 했던 그 아름다운 추억의
한자리를 더듬어 보시고 싶었던 것 같다..
벌써 칠순 언저리의 연세에도 회사에 들어오는 순간
그 오래전 회사의 향취와 당신들께서 몸던져 일했던
그 곳에의 회향이 가득하신지 연신
'여기는 뭐였고, 저기는 뭐였고..'
점심식사를 맛있게 대접하고 지금은 많이 축소된 현장을 돌아보고
오래지 않은 과거에 전세계를 주름잡던 당대의 모습에서
이제는 최소량의 생산이지만 품질만큼은 세계 최고급을
지향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에 사뭇 안타까워 하시면서도
시대의 흐름이자 태생적 한계를 가슴아프게 덤덤히 받아
들이시는 모습에 까마득한 후배의 마음이 많이도 저렸다.
그 분들을 모시고 대구 공장 옛부지터를 찾았다..
전부 공장장에 부사장까지 오르셨던 분들이라 진정 자신들의
전성기 시절을 보냈던 그 귀한 자리를 둘러보고 회상에도 젖고
지금의 삼성을 일구어낸 베이스 캠프요, 세계적인 삼성그룹의
토대를 마련했던 이곳..지금은 쓸쓸한 잡초만 무성하지만
아직도 선대회장님의 마른기침 소리가 들릴것만 같은 곳..
선대 이병철 회장께서 대구에 내려 오시면 직접 집무를 보던 자리다..
지금의 기능적인 의자와는 사뭇 다르지만 이 곳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고
직접 현장과 생산을 챙기면서 현재의 삼성의 기초가 된 꼼꼼한 관리의 틀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당장은 어렵더라도 먼 훗날 우리 대한민국이 진정한 세계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는 날 지금 이 영정에 담겨 있는 선대 호암회장의 그 선견지명과
독특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쳤던 경영방식과 감히 말하건대 당대 최고의 혜안을
높이 우러러 평가할 날이 올 것이다..
아주 투박하기는 하지만 여기에 앉아서 보고를 하고 때로는 꾸중을 듣고
아주 드물게 칭찬을 받으면서 제일모직의 대 원로들은 그렇게 자신의 꿈을 키우고
회사를 건사했으며 한국의 경제발전에 적지않은 탄탄한 밑거름을 뿌린 것이다..
마치 근현대 사극에나 나올법한 정경이지만 나에게는 지금도 저 자리에
선대회장의 추상같은 질타와 날카롭기 그지 없는 지적과 사업보국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 남다르게 달리시는 선대회장의 모습이 어리어 보인다..
한국동란이 끝난 바로 그 다음해 제일모직 공업주식회사로 시작한 이 곳에서
수입대체와 한국 경공업산업의 힘찬 역동이 시작되었다..
믿음을 주고 바르게..잔꾀 부리지 않고 부지런하게..
지금도 이 삶의 철학이 주는 가치는 변하지 않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화려했던 제일모직 대구공장의 부지..대다수의 건물이 다 철거되고 지금은 늦가을
스산한 낙엽과 덩그런 빈 공터만이 오늘 이곳을 찾은 대원로들과 청허의 마음을
회억의 침향..그 바다로 이끌어 간다..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본관건물 옥상에서 바라 본 한국경제의 첨병역할을
했던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소중한 제일모직 공업주식회사의 본관과 삼성그룹의 효시가
된 사업장 부지터이다..
인연이라면 인연일까..이 대구공장 부지의 정중앙부위가 나의 할아버지 항렬이 보유하고
있던 땅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나는 옥산초등학교를 거쳐 동중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동안 제일모직 대구공장
후문 건너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배정받은 대구 동 중학교에 다닐려면 당시 27번 버스를 타고 지금의 대구은행 본점
뒷편에 위치한 학교로 통학을 해야 했는데 어려운 집안살림 때문에 교통비에 늘
허덕 거렸다..하지만 당시 제일모직에서는 다니는 직원들의 자녀를 위한 통학 버스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버스는 시내버스보다 늘 덜 복잡고 항상 자리를 앉아서 갈 수
있었으며 성능도 훨씬 더 우수했었다..어린 마음에도 돈 조금 아껴 볼려고
그 버스에 타고 있으면 어떤 버스기사는 그냥 눈감고 넘어 갔지만, 까다로운 기사는
늘 좌석을 돌면서 아버지 어느 부서에 다니냐 하고 물어보면서 우물쭈물 하는 녀석은
내리라고 강압적으로 내몰곤 했고..꿀밤세례도 받기 일쑤였다..
그 버스에서 쫓겨나면서 그 어린 마음에도 언제고 기필코 이 회사에 들어오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했으니..어쨌던 그 어린시절의 갈망을 하나 이루긴 이루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도시락을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나는 늘 알루미늄으로 만든 타원형 도시락에 무우 말랭이나 김치가 반찬의
전부였고..그 반찬통은 당시 맥스웰 하우스 커피의 빈병이었다..시어 빠진
김치를 담기 일쑤여서 두껑을 열면 옆에 있던 제일모직 다니는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코를 막기 일쑤였고..그들의 도시락은 늘 보온밥통에 반찬도
계란말이..계란후라이..햄을 계란에 무쳐 튀긴 당시로서는 아주 귀하고
고급스러운 반찬들이 대부분이었다..그래서 당시의 나에게는 제일모직이야말로
가장 부럽고 꼭 나의 아이들에게는 내가 느꼈던 그런 설움을 가지지 않게
만들겠다고 다짐하고는 했다..아버지는 그 당시 어렵게 무태근처에서
깻잎도 심고 정구지(부추) 농사를 지으며 근근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콧등이 시큰하고 눈가에 안개비가 내린듯 하다..
야은 길재선생이 남겼던 회고시가를 약간만 각색하면..
육십여년 창업지를 필마로 돌아서니
자손은 우뚝한대 원터는 쓸쓸하네
아즈버 직물은 고루해도 그 흔적은 세계를 누비누나..
제일모직에서 2003년 당시 금액으로 오백억원을 투자하여 지은 오페라하우스..
대구시에 기증을 하여 지금은 대구 경북지역의 소중한 문화공간이자 각종 음악행사의
대표 아이콘이 되고 있다..디자인이 조금 불만스럽다..
선대회장께서 대구에 내려 오시면 기거하고 집무를 보던 본관전경..삼성그룹의
뼈대가 되고 Cash Cow역할을 했으며 관리와 치밀함의 삼성그룹 문화가
태동되고 많은 관계사로 퍼져 나간 곳이다..
항상 시대를 앞서가고 경제문화를 리딩했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배님들이
저 본관의 미닫이 문을 열고 닫으며 그 팍팍했던 시대에 엘리트로 거듭 나셨다..
나 자신도 1988년 입사하여 저 곳을 지나면서 언젠가 이 곳의 공장장이 되겠다
가슴속에 꿈을 영글어 내던 곳이다..
선대회장께서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조경시설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관상수들..많은 나무들이 지금 구미공장으로 이식되어 있다..
당시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겨우 졸업한 우리의 누나 이모, 고모들이
근무하고 그 지친몸으로 다시 학업을 회사내 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달콤한 잠을 자고 심신을 추슬렀던 여자 기숙사 전경이다..
당시의 기숙사 군기는 지금 왠만한 군부대 이상으로 기숙사 사감의
권위는 가히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그 엄한 근무환경과 기숙환경 속에서
우리의 언니들은 그렇게 가정을 일구고 한시대의 엄마가 되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의 주춧돌이 되었다..
지금 비록 역사의 중앙무대에서는 은퇴를 했지만 최고품질위주의 전통은
삼성의 전관계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그 사업의 원형은 비록 규모는
많이 줄고 조촐해졌으나 아직도 제일모직의 한 사업팀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지금 삼성그룹에 남아있는 유일한 제조업 원조이다..
오늘 다녀 가신 대 원로선배님들의 염원대로, 지금 근무하고 있는 우리 직물사업부의
모든 식구들의 염원대로 비록 대규모 이익이나 매출, 생산등의 역할은 못할지라도
그룹의 원조로써 모태로써 당당하게 직원모두가 개인적인 이득이나 영달보다는
이 소중한 한국경제의 초석이 되었다는 근거 확실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앞으로도
더욱 더 성실근면하게 개선활동을 계속하면서..실속있고 알찬 사업으로
삼성의 뿌리가 되고 정신적 쉼터로써 그 영속성을 지속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빌고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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