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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건강

[스크랩] 사주 명리학 이야기(13편)

지난 편의 글을 올리고 나니,

 

몇 몇 분들이 댓글이나 쪽지를 통해서

도대체 이 우주론이나 다중우주론이 사주 명리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냐?

하는 내용의 질문을 던져 주셨다.

 

나름대로 그 때 그 때 설명한다고 대비하는 내용으로 전개를 했는데

그것이 아마 저의 의도와는 다르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저의 글 솜씨가 아직 만인을 쉽게 이해시키기에는 역부족이란 것을 통감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조금 더 쉽게 풀어서 구체적이면서도

실제 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내용위주로 써 나가고자 하는데

 

이 또한 제 머리 속에 있는 생각과 논리의 전개를

100% 전달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누벼 이은 다중우주와 사주 명리학과 관련되는 내용은 무한의 개념이다.

 

제 아무리 생년월일시가 같고 남녀의 성별이 같다고 하더라도

라는 개념이 두 시간을 한 시로 묶어놓은 것이고

 

60간지라는 것도 어찌 보면 무한대의 개념,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무한대를 향해 나아가는 개념을 억지로 묶어서 진법으로 구성해

놓은 것이어서 비록 제한되어 있지만

 

실제로 각각의 인간과 우주 창조이래의 시간변화를

미세단위로 언급하여 반영하면 지구에서 태어난

 

모든 인구의 총합에 해당하는

각각의 사주가 초 단위의 시간과 장소까지 같은 사주는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누벼 이은 우주론을 대비하게 된 것이다.

 

60간지의 네 기둥과 월의 심천(, , 정기 구분),

남녀의 구분을 합하면 약 7천만 개의 서로 다른 사주구성이 가능하며,

 

태어난 생시의 초 단위까지 완벽하게 같은 사주의 확률은

2시간 X 60X 60초가 되니 7천만 곱하기 7,200이 되어

미세시간 구조에서의 동일한 사주는 사실상 찾기가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한대의 시간 개념을 적용해서 인류가 앞으로

지구에서 수억 년을 더 살아가게 된다면 분명하게 완벽하게

초 단위까지 꼭 같은 사주는 나타나게 마련이며,

 

만약에 몇 십 년 또는 몇 백 년 단위로 지구,

아니 내행성 운행 궤도에 진입하고 빠져 나가는 혜성이나

 

저기 저 먼 우주 심연의 한 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초신성 폭발에서 방출된 다량의 감마선이

가끔씩 우주의 공간을 날아와서 지구에 투사되는 경우,

 

비주기적으로 폭발하는 태양의 플레어 현상 등등 사주구성에

미약하나마 영향을 미치는 모든 천문 물리학적 변수들을 감안한다면

 

진정 꼭 같은 사주를 찾기란 무한대의 개념을 도입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언급을 한 것이다.

 

두 번째 인플레이션 다중우주론에서 차용해 온

사주 명리학과의 연관성은 이렇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다.

 

즉 초기의 조건에 따라 현재 거론, 채택되고 있는 물

리학, 수학적 이론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속도, 팽창이 있을 수 있다는 개념인데,

 

이 개념은 정말 생시까지 꼭 같은 두 사람이

 

태어난 조건이 한 사람은

세계 최고의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한 사람은 IS의 끔찍한 약탈이 자행되고 있는

이라크 한 지역이라고 치면 분명 사주는 동일하지만

 

이 두 사람의 성장과정이나 인생의 전개가

비슷하리라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초기 조건,

가지고 태어난 초기의 고정변수는 사주에서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부유한 조건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아버지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역시 왕세자의 생활을 할 것이고

 

이라크 지역에 태어난 아이는

어려서부터 물 한 모금에 목숨을 걸고

날마다 쏟아지는 총탄의 그물아래 늘 전전긍긍하게 되며

잘하면 애면글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데 행복함을 찾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꼭 같은 사주를 가지고 아프리카 원주민의 아이로 태어난다면

성인식 한다고 사자를 잡으려고 하다가

 

무참하게 사자들의 먹이로 분해되기 쉬운 것이

지금 지구촌의 구성이 아닌가.

 

그래서 초기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우주들이 팽창하면서

 

지금도 끊임없이 우주를 생산할 수 있다는

인플레이션 이론과 적절하게 대비되기 때문에 언급을 한 것이다.

 

물론 억지 논리가 없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일반화의 오류는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우리 인간들의 인생조건을 대변할 수 있어서 채택한 것이다.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앞 편에서 언급한 이 인플레이션 다중우주이론이 증명되려면

먼저 인플레이션 이론의 타당성이 증명돼야 한다.

 

인플레이션 이론 자체는

우주배경복사 관측으로 설득력을 지니게 됐지만,

 

1980년대에 Roger Penrose 라는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과 교수가 주장했던

초기조건 문제

(인플레이션이 다른 형태로 일어나거나 심지어 일어나지 않고

지금과 같은 평평한 우주가 나타날 확률이 훨씬(1,010,100) 높다는 주장)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고

또한 이 인플레이션 이론의 절대 핵심인 팽창 장은

측정을 통해 증명되지 않은 가설적인 장이다.

 

영원한 인플레이션이 만든 다중우주의 흔적을 검출하려는 시도도 있다.

 

한 미국 뉴욕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는 2011년 한 논문에서

팽창하는 거품 다중우주가 서로 충돌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우주배경복사에 특정한 무늬나 흔적(온도 차이)을 남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각각의 개별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보다

암흑에너지에 의해 우주끼리 서로 멀어지는 속도가

더 빨라 만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우주마다 물리법칙이 다르다는 가정도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지 엘리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 타운대학교

수학과 석좌교수는

 

20118월 미국 과학 잡지 [Scientific American]

기고문을 통해

 

영원한 인플레이션 자체만으로

다중우주마다 다른 물리법칙이 있다는 결론을 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앞 편에서 인용한 뉴스에서 봤듯이

인플레이션 다중 우주론은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아홉 가지 우주론에서 가장 강력한 설득력과

거시적 관측결과를 바탕으로 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추가적 연구와 관측을 통해 빅뱅우주론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부속 또는

병행이론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 이 사실이다.

 

사주팔자에 간 합 지 형(干合支刑) 이라는 격이 있다.

 

일주와 천간은 干合을 하고 지지는 형을 구성하는 것을 말하는데

 

干合이나 支刑

남자의 경우 재성과 연결이 되거나

여자의 경우 관성과 연결이 되면

 

이성문제로 인한 심각한 구설수, 형살, 손실 및 악재 등의

흉작용이 나타난다고 해석한다.

 

요즘 말들이 많은 하급자 성추행,

몰래 카메라, 성폭행, 외정으로

인한 치정 사고 등을 의미하는데

 

예가 적절하지는 않지만

인플레이션 이론과 빅뱅이론은

이 것 못지않게 많은 논란거리와 함께

추후 대표적 우주생성표준모델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이야기가 나와서 과거의 한 예를 언급하면

정윤X라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저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여배우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 덜컥

유부남과의 외정으로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물론 영화배우로서의 더 이상의 활약은 없었고

감옥 까지 갈 뻔 했는데

 

어찌 일이 잘 풀려서 결국 그 유부남과 결혼에 성공했고

중간의 힘든 과정을 거쳐서 비교적 잘 살고 있는 편이다.

 

이런 경우는 干合支刑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비교적 그 해결과정이 잘 풀렸던 케이스이다.

 

나중에 성장한 아들이 미국에서 사망하는 아픔도 있었다.

 

 

어쨌거나 태어난 사주도 중요하지만

초기조건과 그 초기조건들이

엮어내는 힘의 구성에 따라

사주의 격과 인생의 항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것이 틀림없다.

 

시쳇말로 부모 잘 만나면 사주,

뭐 그런 거 필요 없을지도~!^^

 

세 번째 언급하는 우주 구성이론에서는

 

많이들 들어보시고 알고 계신 양자역학과

이 양자역학에서 해석하는 미시세계의 그 현란한 마술적 세계이다.

 

불확정성 원리, Erwin Schrödinger 의 고양이 실험,

이중 광자 슬릿 실험에서 발견한 빛의 입자,

파동 동시논리 등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는 봤어도

 

실제 이 이론이 의미하는 심오한 우주논리에는

쉽사리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이론이다.

 

근래에 들어 끈 이론이 대두되면서

이 양자역학이 가지는 애매모호함은 어지간히 해소가 되었지만

 

그래도 이 이론처럼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하면서도 그 개념은 웬만한 물리학자들도 쉽게

설명을 하지 못하는 기이한 이론이다.

 

제가 아는 한 가장 쉽게 설명을 하자면

마이크로 세계에서의 입자(전자, 광자, 중력자, 양자 등등)

여기에서도 존재하고 저기에서도 동시에 존재하는 편재성이며

 

확률이 지극히 낮기는 해도 발생 불가능한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한참 전에 데이비드 코퍼필드라는 천재적인 마술사의 영상을 한 번 보시라.

 

 

 

 

한번들 다 보셨을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만리장성의 벽을 통과하는 마술이다.

 

신기하기 그지없지만 역시 마술은 마술일 뿐 실제

데이비드가 저 벽을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교묘한 조명장치와 사용한 사다리와

무대가 그 해답이지만

 

정말 개인적으로 웃겼던 것은

 

법륜공의 창시자인 리홍즈(李弘志)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마술을 몇 개 보고서는 

 

 그는 (실제의 초능력을 가진) 위대한 Great master라고

칭송해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분명 그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밀도가

수십 배 이상 큰 돌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 어떤 물리학적 법칙으로도 불가능한 현실이며 진리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확률적 세계에서는 비록

그 가능성은 매우매우 낮지만 일어날 확률은 반드시 존재하며

 

수십, 수백 억년을 거쳐서 한번은 일어날 수 있는

확률분포를 가진 엄연한 [발생 가능한]일이다.

 

양자는 파동이며 입자의 특성을 고스란히 지니며

 

관측자의 유무, 의지에 따라서 분명하게 영향을 받는다.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좋아하는

홍어삼합(잘 삭힌 홍어, 매우 시어서 먹기조차 힘든 김치, 그리고 쫀득쫀득한 돼지 수육 한 접시)

오늘 내가 저녁메뉴로 선택을 했다.

 

그런데 혼자서 청승맞게 먹으려고 하니 좀

거시기해서 친한 친구를 하나 불렀는데

 

그 친구가 이 환상적인 조합을 함께 할 가능성을 따져 보자.

어느 친구를 고를 것인가?

 

집 근처에 살고 홍어삼합에 탁주까지 곁들인

홍탁을 즐기는 친구가 있고

 

샌님처럼 깨작거리면서

 

홍어의 강한 암모니아 성분은 오줌으로 배출되어야 할

나쁜 성분이라고 멸시하는 조금 먼 거리에 사는 친구,

 

그리고 지금도 장유에서 이빨여단의

남부지역대의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괴팍스럽지만 정이 넘치고 함께 있으면 더 좋은 대물 친구

두 사람이 있다면 나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선택하기 이전의 가능성은 비록 확률은 다르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나의 성격이 깨작대는 놈은 죽어도 싫고,

가까이 사는 이 친구는 술만 들어가면 2,

무조건 고~!를 외치는 놈이라 싫고 해서

 

멀지만 차비 대 줄 터이니 올라와라 하면서

장유와 부산의 두 사람을 호출할 수 도 있다.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누군가 선택이 되어

오늘 저녁 나는 함께 맛있고 환상적인 홍어의

그 폭발성 중독음식을 즐기고 냄새 풀풀 풍기는

뜨거운 열대야를 보낼 것이다.

 

관측이나 실제 발생이전의 가능성은 높고 낮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발생 후의 관측이나 경험은

단 하나의 선택이 가지는 이후의 과정이 연속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적 세계에서는 내가 각각

서로 다른 세 친구와 각각의 시간을 가지는

경우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기이한 결론으로 내려진다.

 

내가 겪고 있는 사건은 단 하나이지만 내가 생각했던,

어쩌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경우가

실제로 내가 겪고 있진 않지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해석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닐스 보어와 그 추종자들이 확립한 코펜하겐 해석이며

지금도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주류로 인정을 받고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말도 되지 않는 해석에는

오류로 판단되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관측, 사건의 직접적 경험으로 귀결되는

(양자의 상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정작 원류방정식인 슈뢰딩거 방정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꾸어서 얘기하면 방정식에 없는 방법

(그것도 다소 주관적이면서 편리위주인 해석으로)을 사용해서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것인데,

 

이것을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파동함수의 붕괴로 표현한다,

기실 이해하기 어렵고 최신 물리학에서는 점차 도태되고 있는데

 

1982년에 사망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양자물리학의

대가 Hugh Everett의 다중우주 해석이 그 시발점이었다.

 

이 해석의 최대 장점은 해당자,

또는 관측자가 관측을 해도 원래의 양자 파동함수는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설명한 동시 존재확률이

각각의 세상, 현상계로 갈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각각의 갈라진 세계 하나하나가

모두 다중우주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잠깐 이전에 제가 아들 녀석과 블로그에서

나누었던 대화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블로그에 다중우주가 암시하는

철학적 면면에 대한 사색 및 고찰을 올렸더니

아들 녀석이 아버지 블로그에 놀러 왔다가 남긴 댓글이다.

 

(밤에 잠 못 이루는 아들이 잠시 들렀습니다.

현재 제 삶은 젊은 시절의 게으른 데카르트와 다를 바가 없군요.

 

부끄럽습니다.

다중우주. 얼마 전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양자역학에

대해 쉽게 써놓은 4편의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물론 과학적인 수식과 개념 용어들이 난무하는

그 영상에서 제 이목을 집중시켰던 부분은,

양자역학의 최극단에서 나타나는

 '관찰자의 지각적 확률에 대한 사물의 인식',

그리고 거기에서 발단된 철학과의 연계성입니다.

 

관찰자가 사물을 관찰할 때에만

그 사물은 그곳에 존재하며,

관찰하지 않을 때에는 양자역학의 법칙에 따라

모든 곳에 동시에 있으면서도 없는 그런

끊어지지 않는 물엿 같은 성질을 띤 다는 것.

 

그렇게 되면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이 되는 것일까요?

 

관찰자의 존재유무일까요,

사물의 물리적인 존재유무일까요.

 

관찰자가 없다면 관찰자가 보지 않는 현실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제가 보지 않을 때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세상은 현실에 존재하는가요

아니면 이데아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제가 댓글 첫줄에 데카르트를 말했습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전문을 학교 도서관에서

구해서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다는 읽지 못했지 말입니다)

 

게으른 데카르트씨

(데카르트는 인생의 90퍼센트를 하루에 12시간 수면하면서 지냈다더군요)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입니다.

 

, 한 개인이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한 확신을 가진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존재하는 것이 되겠지요.

 

저는 이런 결론을 감히 내리고 믿어보렵니다.

'만인을 위한 정답은 아니겠지만'이라는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fact에 대한 가능성이 여러 가지 인만큼

그 가능성들을 각각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믿음에서 오는 자신만의 정답이 있는 것이 당연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가지 fact에 대해 각 개인이 인식하는

각 현실(우주)이 달라지겠지요.

 

바로 거기서 양자역학과 평행우주의 연계가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이 문제를 다가가는 저의 철학적(나아가 윤리적) 관점입니다.

 

바로 사람하나 하나가 보는 우주가 달라진다면,

 

그 각각의 개인은 타인으로부터 하나의 우주에

걸 맞는 존중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이랄까요.

 

너무 멀리까지 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각 개인은 자신이 관찰하고 인지하는 현실(우주)의 창조주인 셈입니다.

 

이렇게 관찰되는 현실을

저희는 한 개인의 인생철학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두고두고 말하신 동학의 '인내천'사상이

그래서 새삼 위대하다고 느낍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해석한

이 모든 '인내천'을 품고 제 자신의 우주를 키워보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지표이며,

남들에게 인정과 확신, 믿음을 얻기 전에

누구보다도 제가 이것을 믿고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앞으로 조우하는 어떤 사람은 인도적인 우주를 가졌을 것이며,

어떤 사람은 비관적인 우주를 가졌을 것이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우주의 기본적인 틀조차도 튼튼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수많은 경우의 수조차도

자연의 순리라 믿으며

 

충돌해야할 때에는 충돌하며,

포용해야할 때에는 포용하며,

 

제 우주의 골격을 깎아야할 만큼의

위대한 우주를 만났을 때에는

여지없이 깎겠습니다.

 

제가 지금 제 자신에게 하는 다짐인 동시에

제가 저렇게 살면 적어도 다른 이에게

일련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입니다.

 

가을 탓인가요. 사색이 너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는 '' 밖에 못하는 짓궂은 아들을 용서하십시오.)

 

아들 녀석이 스무 살 즈음에 단 댓글인데 하도 기특하기도 해서 다음과 같이 답글을 달아 주었더랬다.

 

<ㅎㅎㅎ,

 

아들 새벽까지 잠 못 들, 사색이 지나쳐서 지적인 향유를 누리고 있구먼..

그래 맞다.

 

아들이 양자역학의 철학적 개요와

그 연계성에 대해 이토록 심오하게 깨치고 있을 줄은 아빠도 잘 몰랐었구나.

 

내가 만들어 가는 세상과 우주,

따라서 내가 만드는 우주의 창조주.

정말 멋진 말이자..명쾌한 논리.

 

깔끔한 정리다.

감탄한다.

 

그 옛날 무학 대사가

태조 이성계와 나눈 유명한 대화,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

 

데카르트는 게을렀지만

머리와 생각은 늘 진리.

즉 보편적 진실에 대한 구성 원리에 대해 늘 궁금해 하고 갈등하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굴려보면서 나름대로의 철학적 논리를 세워 나갔을거야.

 

잠을 몇 시간 자고 이런 것은 외관적으로 보이는 현상에 불과할 뿐..

 

아들이 가지고 있는,

어찌 보면 완전히 여물지는 않은 듯

 

자신만의 주관과 세상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설정과

사고. 행동양식의 전개는 단순하게 맞다 맞지 않다는

흑백논리로 평가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말하면

도균이의 세상은 도균이가 바로 하늘이요..

 

모든 현상에 대한

평가..

감정..

이해..

애증..

사랑..

행복 등의 느낌에 대한 최초이자

궁극적 결론을 내리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아버지라고 아들이 맞느니 틀리니 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여 지네.

 

내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과연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일까?

 

늘 남에게 웃고 여유 있게 산다고 해서 과연

나의 속마음까지 항상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일까.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그런 외형적

행동을 행하기 이전, 중간 이후에서조차도 나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후회하고 흐뭇해하고 하는 생각,

감정들을 쏟아내고 있단다..

 

내가 미소 짓는 바로

그 순간에서조차 그런 동시다발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이지.

 

결국 양자역학의 원리에서 보면 발생한 결과가 나타나기 위해

존재하는 여러 가지 다른 확률들은 곧 나의 감정의 동요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고,

 

가장 높은 확률로 내가 행동하게끔 만드는

어떤 힘..그것이 웃자는 소리로 수련이 되었느니, 내공이 높니 하는

그런 것들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들, 글로써 어찌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얘기를 하겠는가만..

 

이 세상,

내가 그려내는 세상임은 틀림없지만

보편적 타당성과 기준으로 이런 지적 향유를 누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이런 향유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백 그라운드,

즉 사회적 여유,

경제적 여유,

인간적 여유,

그것이 어쨌든 요구된다는 것 또한

우리가 선택한 이 우주의 편재하는 논리라네..

 

그래서 하나라도 더 배우고 잘하고 적응력을 높이고 하는

애면글면함이 요구되는 것이라네.

 

그래서 나의 미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경우수의 우주에서

내가 선택해서 내가 아름답게 창조적으로 살 수 있는

우주로 가기 위해 지금의

고통,

서러움,

갈등과

고민들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진리..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아들에게 지금 상황에서

가장 골라주고 싶은 미래, 우주,

 

물론 아들이 선택해서 걸어가야 할 우주겠지만.

그것은 아들이 나중에 가장 후회하는 경우수가 낮고

발생확률도 낮은 그런 우주가 아니겠나..

 

가을의 길목에서 깊어지는 사색,

아들의 영혼이 성숙하는 과정,

 

이런 글로 주고받을 수 있는(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이 현재의 우주가 나는 너무 아름답네.

 

조용할 때 저녁에 술 한 잔 나누면서

그 옛날 고승대덕, 성현들이 주고받았던 고담준론을 한번

펼쳐보자. 일찍 자거라. ^^

 

오년 전에 이 글을 주고받으며 느낀 것은

하나의 표준 모델 이론이 있어도

저마다 받아들이는 깊이와 범위, 감흥이 다르다는 것.

 

절대적인 이해의 표준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이 양자역학적 다중세계 이론이 사주 명리학과 가지는 연계성은 이렇다.

 

, 다양한 미래의 존재 가능성에서

완전히 무시해야 하는 것은 없으며

 

사주의 구성 및 해석을 통해서도 확정적으로

결정된 미래는 없는 것이니,

 

지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능하다면

이 사회적 체계에서 인정받고 즐거울 수 있는 조건 확보를 위해,

내가 만들어 내는 미래 다시 말해서 내가 선택하는 미래는

얼마든지 바뀌어 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차례 언급을 했지만

내가 가진

그릇,

역량,

장점,

단점을 가지고

 

부족한 것은 보완하고

단점을 메꾸면서

장점을 잘 살려 나간다면

 

그냥 주어지는 선형회귀곡선의 삶보다는

 

조금은 더 상향적이고

꺾이는 시점의 각도도 조금은 더 완만하며

착륙을 하더라도 Soft Landing(연착륙)을 통해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개의 미래에서

조금 더 괜찮은 어쩌면 그런 과정을 통해 나중에는

굉장히 큰 변화를 이끌어내는 내가 즐겁고,

풍족하며, 남을 더 돌봐줄 수 있는 여유로운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벼 이은 우주가 무한에 가까운 배열조직으로

무한대에 가까운 사주구성을 설명한다면,

 

인플레이션 우주는 초기 태생적 조건 및 변수가

내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리고 그 조건에 따라 지금도

다양한 영향인자들이 계속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이 양자역학적 다중우주 이론은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미래는 바꾸어질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사실상 내가 이 사주 명 리 학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여기서 나온다.

 

지금까지의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내가 무엇을 하느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그리고 그렇게 실행하느냐,

그 실행의 강도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상당한 폭을 가지고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 계속 -

출처 : 잇빨중사카페 ★ 잇빨기행여단
글쓴이 : 청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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